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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 - 이원흥 / 좋은 카피를 쓰는 습관

by 박종인입니다. 2020.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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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페이지 남짓의 분량을 참 오래 읽었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몇 장 페이지에 함축시킨 저자의 글은 조사 하나도 천천히 곱씹어 참맛을 봐야하는 오래된 집된장과 같다.
가령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 “덜 사랑하는 것이 더 사랑하는 것이다” 와 같은 문장은 반나절 이상 내 시간을 묶어 둔 녀석들이었다. 아마도 카피라이터의 산고(産故)가 명품 글을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 이원흥은 “광고 카피만 카피랴, 남의 마음을 흔드는 것 다 카피다.”라고 주장하는 28년차 카피라이터로 제일기획을 거쳐 현재 농심기획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카피로는 “장애라는 말이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삼성), “열지 않고도 본다”(애니콜), “싸니까! 믿으니까! 인터파크니까!”(인터파크), “다르게 생각해서 바르게 만듭니다”(풀무원), “누구에게나 4분 30초의 순간은 옵니다”(신라면) 등 귀에 익숙한 카피들의 크리에이터이다.



책은 2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그 중 몇을 소개해보면,

“나는 잘 나갈 때의 겸손보다 일과 인생이 바닥일 때의 찌그러지지 않는 품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필요하다. A기업의 B브랜드 광고를 만들 때도 그런 때였다. 클라이언트의 스트라이크 존은 바늘구멍보다 작아 보였다. 당장은 어둡더라도 끝은 환한 터널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막다른 벽만 만져지는 캄캄한 동굴이었다.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링에 억지로 올라야 하는 복서처럼, 스스로가 한없이 처량하고 쓸모없어 보여 견디기 힘들던 그때, 같이 시안을 준비했던 후배들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그리고선 씩 웃으며 포스트잇이 붙은 음료수 하나를 건넸다.



누군가는 당신을 물로 보지만
우리는 당신을 보물로 봅니다.

카피라이터로서 지금의 나를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사람은 시골에 있는 어머니도 아니고, 대학 때 은사님도 아니고, 지금 회사의 사장님도 아니고,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족족 박살내 버리는 클라이언트도 아니다. 목욕탕 같은 회의실에서 함께 벌거벗고 앉았던 바로 그 동료다.” (카피의 신 중中)

“개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있다. 미친 듯이 제 몸을 긁어대는 개를 붙잡아서 털 속을 헤쳐보라. 진드기는 머리를 개의 연한 살에 박고 피를 빨아먹고 산다. 머리와 가슴이 붙어 있는데 어디까지가 배인지 꼬리인지도 분명치 않다. 수컷의 몸길이는 2.5밀리미터, 암컷은 7.5밀리미터쯤으로 핀셋으로 살살 집어내지 않으면 몸이 끊어져버린다.
한 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 나올 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다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경을 ‘몰두(沒頭)’라고 부르려 한다.” (진드기처럼 쓰자 중中, 성석제 작가의 글)



“책 많이 읽은 나쁜 놈들은 책의 권위를 나쁘게 쓴다. 많이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자기 과시의 재료로 삼거나, 재 생각은 없이 책에서 가져온 말을 제 말인 양 쓰기도 한다. 하룻밤에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한들 그런 독서는 좋은 카피라이터가 되는 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나’는 유일한 존재다. 카뮈보다, 김훈보다, 쉼보르스카나 카프카보다, 유일한 존재로서 내가 우선이다. 광고 카피는 차별화의 숙명을 필연적으로 안고 가는데 독서란 ‘나’라는 유일한 필름에 감광된 카뮈와 같다. 그래서 남들이 다 아는 카뮈 가지고서는 애당초 써먹을 데가 없다. 내가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만큼 나에게 공명한 카뮈 역시 유일무이해야만 한다. 그래서 적어도 카피라이터를 위한 독서라면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카뮈가 아닌 ‘새로운’ 카뮈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러니 무턱대고 남들이 좋다는 책을 펼쳐보기에 앞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 더욱 시간을 쏟을 일이다.” (어떤 산책은 모든 책보다 낫다 中)



“화가 난다는 건 감정의 문제지만,
화를 낸다는 건 판단의 문제.”
(SNS라는 연습장 中)

카피라이터로서 좋은 습관이란 무엇일까?
사실 ‘카피라이터로서’ 보다 ‘아무개로서’ 즉, 각자의 생업을 기준으로 좋은 습관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봄이 적당할 것이다. 직업상 좋은 습관을 찾으려는 이유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요, 좋은 결과는 절호의 기회에서 찾을 수 있으니 잠시 후 나에게 패스될 공을 상상하면서 그라운드를 가로질러야 한다. 기회는 나에게 공이 올 거라 믿고 죽어라 달리는 자에게 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저자의 글에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이 느껴진다. 매력적이며 욕심나는 집중력이다. 좋은 책이란 사색으로 이끌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많은 사색의 시간을 요하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모두 카피라는 제목이 흔쾌히 와 닿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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