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소설의 주인공 ‘나’의 칼에 새겨진 검명(劍名)이다. 무릇 장수는 나름의 뜻을 품고 전쟁에 나서는데, 그 대의가 공명(功名), 구민(救民), 복수(復讐) 등 그 향함이 각색이다. 오늘의 책 <칼의 노래>에는 ‘칼로 벨 수 없는 적’까지 섬멸하고픈 무장의 한(恨)이 서려져 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의 병술로 왜선을 함몰시키고,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수장시킨 ‘나’는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자리를 고심한다. 그러나 그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나’에 대한 원균의 시기(猜忌)는 개인적 몰락뿐만이 아니라 칠천량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가져왔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내륙의 전라와 충청까지 내어주고 말았다. ‘나’를 향한 임금의 질투는 장수를 전장에서 몰아냈고, 도망간 군주를 모셔야 하는 비굴함을 남겼다. 또한 터전을 잃은 백성을 적국의 포로로 만들어 적국의 방패로 서로를 맞이하게 했다. 지금의 한양은 내가 압송되어 죽을 자리가 아니었다.
‘나’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아들이 왜구의 칼에 한쪽 어깨를 다친다. 가까스로 아들을 아산으로 피신시켰으나 ‘나’를 노린 왜구의 복수로 아들을 잃게 된다. 전령에게 아들의 부고를 듣던 날, 나를 닮은 그놈의 (어린 시절) 젖 냄새가 떠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늘이 ‘허락한 그 날’이 아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소금 창고로 향해 숨죽여 울었다.
명의 장수 진린은 전장의 물길이며 적의 정황을 물어오지 않았다. 선발대도 전령도 보내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우리 수군과 명의 수군을 어떻게 접속시킬 것인지, 전쟁의 국면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알리지 않았다. 진린은 결정적 국면에 ‘나’와 우리 수군을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내가 오늘 이 자의 목숨을 거둔다면 명과 일본이, 그리고 조정 전체가 나의 군사적인 적이 될 것이다. 나의 죽음은 내가 수락할 수 없는 방식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
고금도 덕동 수영에서 출동을 준비할 때다. 발진 전날, 그해 여름에 담근 된장을 백성에게 배급하고 있었다. ‘나’는 수영 창고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된장 독을 지고 가는 백성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백성들은 배에서 드시라고 말린 육포를 한 보따리 들고 왔다. 육포를 내민 백성들이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나으리, 이제 또 수영을 버리시는 것입니까?” 새벽에 함대는 동진했다. 섬과 섬 사이의 좁은 물목을 가득 메우고 다려가는 함대를 바라보며 연안의 백성들은 통곡했다. 버림받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이 백성을 두고 죽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졸음이 내 입을 막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 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책 326~328 발췌)
‘나’의 칼은 언제나 슬프게 운다. 칼로 벨 수 없는 적은 포로 된 우리의 백성이며, 동료이자, 임금이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을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인간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도리는 무엇이며, 극복해야 할 두려움은 어떤 것일까?
책을 읽는 동안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나’가 되어 배신감, 두려움, 그리움, 복수심, 굶주림, 측은함, 용기, 단호함, 이런 감정에 취해 일주일을 보냈다. 왜 김훈 작가를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심리 묘사는, 같은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으로서 존경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소설의 힘을 느낀다. 등장인물에 동화되어 사건에 몰입하는 경험은 또 한 번의 인생을 살 숨겨진 기회다. 더욱이 역사적 평가가 있는 인물이라면 무게를 더한다. 많은 독자가 찾아 읽고, 그 기회를 누리기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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