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이기주의 인문학 산책 - 이기주 /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by 박종인입니다. 2022. 5. 29.
728x90

 

가끔 겨를이 생겨 마을 수변 길을 걷노라면 그동안 놓쳤던 꽃 무리, 수풀의 군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이름 모를 새며,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는 오리도, 이때는 그 깃털의 색깔까지 자세히 살피게 된다.

 

산책은 이러한 여유로움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어이다. 바쁜 와중에는 산책을 즐길 틈이 없다. 망중한을 위한 의도적 여유로움이야 가능하겠지만 그것 역시 올곧이 생각의 고삐를 놓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참 오랜만에 넉넉한 시간이 생겨 인근 찻집에서 책 한 권을 펴게 됐다. 이기주 작가의 <인문학 산책>이 그 책이다. 서른 개에 달아는 주제를 담담하게 전달하는 저자의 글은 각 주제 속으로 산책을 다녀온 듯 평온한 기분을 남긴다.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나는 노숙자(homeless)일 뿐이지 희망이 없는(hopeless) 건 아니야.” (중략) 살다 보면 크리스 가드너의 사례처럼, 긍정적인 말 한마디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말에는 분명 모종의 기운이 담긴다. 그 기운은 말 속에 씨앗의 형태로 숨어 있다가 훗날 무럭무럭 자라 나름의 결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63, <긍정> 중에서)

승세가 상대편으로 기우는 순간 지는 행위자체를 사회적 혹은 심리적 죽음으로까지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중략)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도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69~73, <전환> 중에서)

무릇 하수는 기본에 해당하는 그 뻔함의 가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상수는 뻔한 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 사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86~87, <습관> 중에서)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우리말로 번역하면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아기 신발입니다정도의 뜻이다. 벼룩시장에 내걸리는 흔하디흔한 문구 같지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문장 너머에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이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신발을 내다 팔기로 한 사람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잠시 상상해봤으면 한다. (124, <문체> 중에서)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137~138, <여백> 중에서)

글쓰기가 정말 힘에 부친다 싶은 날이면 글쓰기의 링에서 잠시 내려오는 쪽을 택한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기운이 나지 않을 땐 억지로 기운을 내기보다 스스로 기분을 챙기면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게 현명하다. (146, <산고> 중에서)

노자가 말한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행이 아니라 억지로 꾸미거나 힘을 가하지 않는 것, 나아가 사물의 본성과 사안의 규율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도모하는 순행에 가깝다. (213, <욕심> 중에서)

중국 송나라 때 고서 <통감절요>해납백천(海納百川) 유용내대(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바다의 본질이 그러하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넓고 깊어서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담기 때문이다. (238, <광장> 중에서)

 

삶이 꼭 승자 독식의 장이 아님을, 기본을 충실히 하는 게 모든 성공의 근본임을, 의도적으로 비우고 남겨두는 게 가장 많은 것을 채우는 것임을, 그래서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품는 게 옳은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 한다. 여유로운 시간에 삶을 성찰하는 독서가 나의 하루를 살맛 나게 한다. 골방의 작은 틈 사이로 비에 젖은 흙냄새가 들어오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산책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