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겨를이 생겨 마을 수변 길을 걷노라면 그동안 놓쳤던 꽃 무리, 수풀의 군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이름 모를 새며,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는 오리도, 이때는 그 깃털의 색깔까지 자세히 살피게 된다.
산책은 이러한 여유로움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어이다. 바쁜 와중에는 산책을 즐길 틈이 없다. 망중한을 위한 의도적 여유로움이야 가능하겠지만 그것 역시 올곧이 생각의 고삐를 놓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참 오랜만에 넉넉한 시간이 생겨 인근 찻집에서 책 한 권을 펴게 됐다. 이기주 작가의 <인문학 산책>이 그 책이다. 서른 개에 달아는 주제를 담담하게 전달하는 저자의 글은 각 주제 속으로 산책을 다녀온 듯 평온한 기분을 남긴다.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나는 노숙자(homeless)일 뿐이지 희망이 없는(hopeless) 건 아니야.” (중략) 살다 보면 크리스 가드너의 사례처럼, 긍정적인 말 한마디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말에는 분명 모종의 기운이 담긴다. 그 기운은 말 속에 씨앗의 형태로 숨어 있다가 훗날 무럭무럭 자라 나름의 결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 63쪽, <긍정> 중에서)
승세가 상대편으로 기우는 순간 ‘지는 행위’ 자체를 사회적 혹은 심리적 죽음으로까지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중략)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도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책 69~73쪽, <전환> 중에서)
무릇 하수는 기본에 해당하는 그 ‘뻔함’의 가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상수는 뻔한 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 사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책 86~87쪽, <습관> 중에서)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우리말로 번역하면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아기 신발입니다” 정도의 뜻이다. 벼룩시장에 내걸리는 흔하디흔한 문구 같지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문장 너머에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이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신발을 내다 팔기로 한 사람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잠시 상상해봤으면 한다. (책 124쪽, <문체> 중에서)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책 137~138쪽, <여백> 중에서)
글쓰기가 정말 힘에 부친다 싶은 날이면 ‘글쓰기의 링’에서 잠시 내려오는 쪽을 택한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기운이 나지 않을 땐 억지로 기운을 내기보다 스스로 기분을 챙기면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게 현명하다. (책 146쪽, <산고> 중에서)
노자가 말한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행이 아니라 억지로 꾸미거나 힘을 가하지 않는 것, 나아가 사물의 본성과 사안의 규율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도모하는 순행에 가깝다. (책 213쪽, <욕심> 중에서)
중국 송나라 때 고서 <통감절요>에 “해납백천(海納百川) 유용내대(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바다의 본질이 그러하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넓고 깊어서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담기 때문이다. (책 238쪽, <광장> 중에서)
삶이 꼭 승자 독식의 장이 아님을, 기본을 충실히 하는 게 모든 성공의 근본임을, 의도적으로 비우고 남겨두는 게 가장 많은 것을 채우는 것임을, 그래서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품는 게 옳은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 한다. 여유로운 시간에 삶을 성찰하는 독서가 나의 하루를 살맛 나게 한다. 골방의 작은 틈 사이로 비에 젖은 흙냄새가 들어오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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