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정확히 재작년 이맘때,
아내와 함께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1주일을 올곧이 걷기를 계획하고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손 지도를 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몇 번 둘레길을 첫 코스로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을 벗 삼아 굽이굽이 초행길을 걷고 있노라니,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광경을 목도하며 연신 감탄사를 자아냈다. 짙은 회색 빛 현무암으로 쌓아올린 낮은 담장 너머에 50cm 남짓한 비닐하우스(옥수숫대)가 보였다. 비닐 속으로 스프링클러가 돌면서 연신 물을 분사하는 모습이 여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었다.
처음 계획은 하루에 30km 정도를 예정이었지만, 더운 날씨와 무거운 등짐으로 평균 15km 정도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도 무리였는지, 뚱뚱 부어오른 발에는 서너 군데 물집의 흔적을 남았다.
부푼 꿈을 안고 야영을 위한 도구들을 챙겼지만 등짐의 무게만 무겁게 할 뿐, 실제로는 두 군데에서만 텐트를 쳤고 나머지는 숙박업소를 이용하였다. 두 벌의 옷만 가져갔기에 오늘 입은 옷은 당일 세탁을 해서 말려야 했고, 야외에서 빨래를 해결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핑계로 편안한 침대 방에서 잠자리를 해결했지만 지금 돌아보아도 아영 대신 숙박업소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그리웠는지, 이번 주에는 1,900km 영국 종단 이야기를 담은 책, <조글트레킹>을 찾아 읽게 되었다. 많은 걷기 여행서가 있지만, 그리 유명하지 않은 코스이면서도 고즈넉한 여유가 넘치는 곳, 영국의 종단을 느낄 수 있는 이번 여행기는 트레킹을 해본 경험자로써 여행 상황의 감정을 섬세하게 맛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코스를 8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각 단락마다 저자가 숙고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름 이름 있는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려 서술하고 있다. 각 코스별 지명과 생각의 주제를 정리하자면,
첫 번째 코스 (존오그로츠~인버네스) / “어떻게 환희가 되는가?” 에피쿠로스
두 번째 코스(인버네스~포트윌리엄) / “소박하고 원시적인 기쁨” 버트런트 러셀
세 번째 코스(포트윌리엄~멀가이) / “걷기가 주는 위로” 키에르케고르
네 번째 코스(멀가이~베네스) /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만나는 순간” 플라톤
다섯 번째 코스(베네스~크로우든) / “그 순간에도 삶은 지속된다.” 빅터 프랑크
여섯 번째 코스(크로우든~바스) / “행복의 근원을 찾아서” 셰익스피어
일곱 번째 코스(바스~뉴키) / “나는 자연이로소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여덟 번째 코스(뉴키~랜즈엔드) /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 장 자크 루소
여행기는 트레커가 걷고 있는 동선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그리게 된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생생한 기분은 아니겠지만 걸어본 사람이라면 동감하는 감정은 가보지 못한 영국의 시골길을 걷게 한다.
걷기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다. 직립보행을 하는 고등동물로서 두발로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기본적은 증명방식이다.
걷기는 복잡한 마음을 무념의 세계로 인도하는 비상구이다. 집착과 욕심이 만들어낸 너무 많은 생각은 마음을 심난하게 한다. 마음그릇에 가득한 생각을 비워보자. 행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에, 행복하기를 선택하였다면 비우는 기술이 필요하다. 걷기는 이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루틴,
<조글트레킹>은 다시 트리거가 되었다. 이 책이 많은 걷기 초심자의 방아쇠가 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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