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해 인근 돌산(突山)이라는 섬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열여덟 되던 해, 몰락한 윤씨 집안에 셋째 아들과 결혼한 작가의 어머니는 이국의 땅 일본 고베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다나까 철공소라는 간판을 걸고 선반 한 대와 자전거포를 겸한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방랑벽을 앓고 있어, 작가의 어머니는 운명적으로 고독을 한없이 삼켜 가며 가정을 지켜오시던 강인한 분이셨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부모님과 함께 구에하라로 이사한 후의 일화이다.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 작가는 학교 인근 도꾸야마 노인 소유의 나무에 밑에서 떨어지는 계피 잎을 주워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굣길에 일본 아이들과 계피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잎을 막 주우려 하는데 도꾸야마 노인이 오시더니 “이놈의 조센징 새끼가 뭣 하러 왔느냐?”며 마구 혼내는 것이었다. 화를 삭히지 못한 어린 작가는 저녁 무렵 성냥 한 갑을 들고 가 그 집 마당 나뭇단에 불을 놓는다.
다음 날 새벽 도꾸야마 영감이 집으로 쫓아와 온갖 욕을 다 퍼붓지만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변상하지요, 얼만지 청구 하세요. 그런데 영남님, 그렇게 조선 사람을 천시하면 못 쓰는 거예요”라며 아들을 두둔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반 급우였던 다께가와가 ‘조선놈 바보새끼’, ‘조선놈은 다 죽어라’며 조선인을 구더기처럼 천시하여 경멸하기에 멱살을 잡고 실컷 두들겨 주었더니 평상시에는 친절하셨던 그의 아버지가 그 날은 더러운 조센징이라며 욕을 하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쫓겨 온 후 하도 분해서 그 친구의 아버지가 관리하던 신사(神社) 지붕에 올라가 오줌을 갈겼다. 일본의 수호신을 모신 신사에 오줌을 쌌으니 마을유지회의에서 학교를 퇴학시키고 부모님이 운영하던 공장도 몰수하고 가족 모두 추방해야 된다고 야단들이었다. 이때에도 어머님은 이유만 물으시고는 어떠한 꾸지람도 없으셨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때 죽어도 고향 가서 죽겠다는 아버님의 주장으로 세 식구는 그저 간단한 트렁크 몇 개를 꾸려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촌뜨기 새댁이 멀고 낯선 이역에서 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15년 만에 피란으로 고향을 찾아와 보니 모든 농가는 극심한 공출(供出)로 식량꺼리를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위장병 환자인 아버지와 외아들을 위해 쌀을 구하려 가신 어머님은 핏기 없는 얼굴로 돌아오셨는데 여수까지 다 와서 순사에게 쌀이 든 보따리를 빼앗기고 말았다며 분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런 얼마 후 해방이 되었다.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아버님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어머님은 오직 한 아들을 위하여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강하게 살아오셨다.
작가가 중학 1학년 때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청년의 죽음을 목도한 어머니는 아들의 등교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배움에 목말랐던 작가는 객지로 가서 고학으로 공부하겠으니 전학금만 좀 만들어 달라 부탁한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그러면 가래나무 30짐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작가는 마을에서 8키로나 떨어진 곳에서 비오는 날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같이 나무를 하여 가래나무 30짐을 해낸다.
그날 밤 어머님은 그만한 인내심이면 객지에 가서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며 전학금을 마련해 주셨다.
해방 후 일본인에게 매입하였던 조선소의 사택은 법률 수속의 미비로 타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그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동네 어른 두 분이 30여 평의 땅을 마련해주어 세 칸 겹집을 짓게 된다. 어머님은 집 한구석에 구멍가게를 차리시고 새벽 일찍 나룻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가 과자, 음료수 등을 가득 머리에 이고 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셨다.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곧 거지의 근성과 통하는 것이며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운명을 개척하는 데 있다.’는 것이 어머님의 신조이셨다.
고등학교 졸업 후 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이다. 어머님은 “사내 놈이 왜 그렇게 대범하지 못하느냐. 너희 아버님은 돈 한 푼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에 건너가 그 나름대로 기반을 잡지 않았느냐? 아직 꿈에 가득 차야 할 젊은 놈이 현실에 만족하고 안일한 생각만 하고 살아야겠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며 아들의 의지를 독려하셨다.
작가는 이듬해 봄, 서울에 올라와 9년 만에 대학을 마쳤다. 아들은 불혹(不惑)이 되어서도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얼마 전부터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형무소를 드나들며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네가 좀 잘되기 위해서 친한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고될망정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른길을 걸어가라. 혹시 처자식 때문에 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든 고향으로 내려보내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같이 먹고, 또 아이들 교육이야 못 시키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나이든 아들을 위로하셨다.
금년 봄 아버님의 제삿날 겸 어머님의 진갑이라 고향에 내려갔다가 어머님이 하도 수척하셔서 아버님 기일제만 모시고 어머님과 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2,3년 전부터 신경성 위궤양으로 몸은 완쾌하시지는 못하지만 가게도 보시고 나들이에도 불편이 없다고 하시기에 종합 진찰이라도 받아보려고 모시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종합병원으로 가시던 중 쓰러지셔서 E대학병원으로 모셨으나 5일 만에 한마디의 유언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한 아들을 위해 장하게 살아오신 어머님이 운명하신 것이다.
마치 한편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효>란 제목으로 피천득 선생님 외 34인의 문인들이 집필한 에세이들 중 35번째인 <나의 어머니>로 문학 출판사 범우사의 회장이자 수필가인 윤형두 선생님께서 쓰신 에세이이다.
매월 찾아오는 5월은 많은 이야기를 담는 계절이다.
시골에 계신 엄마를 뵈러 갔다가 서재에 꽂혀 있는 책 한권을 보고 잊고 살았던 중요한 한 가지를 기억하게 되었다.
작가의 어머님처럼 우리 엄마도 아들을 위해 본인의 삶을 양보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전화기를 들고 다정한 목소리로,
엄마, 아버지에게 전화할 때가 아닐까?
35인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마음에 와 닿는다.
수필집 <효>는 시간을 내어 꼭 읽어야 할 책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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