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절망감이 나에게 던져준 질문은 과연 인간이 이를 스스로 극복하고 자유로워 질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신(神)으로부터의 독립이 인생 최고의 한수였음을 자위하면서,
지금까지 지켜온 강퍅한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기독교 사상과 실존 사상의 철학자로서 코펜하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점차 문학과 철학으로 관심의 범위를 넓혀갔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불안의 개념> 등이 있으며 1855년에 사망하였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이며 절망은 곧 자기 상실이다. 그것은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으로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제1편에서는 절망, 제2편에서는 절망의 여러 형태가 의식의 정도에 따라 설명되어 있고 이 병은 신앙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 의식의 심화가 참된 자기에 이르는 길로 절망의 심리 분석과 함께 극복의 방향은 올바른 기독교적 신앙에서 구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절망의 유형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절망하고 있으면서 절망감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신의 한계(유한성)를 망각하고 끊임없이 외부에서 욕망의 대상을 찾아 쫓아다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은 없는 그런 삶으로 실제는 절망감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절망이란 없으며 여전히 행복하다고 믿는 형태를 말한다.
둘째, 절망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은 경우로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싶은 않은 심리상태로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유하지 않은 나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부유한 특정인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는 절망 가운데서 나란 주체성을 포기하는 상태이며 언제나 눈을 외부로 돌려 나를 부정함으로 느끼는 괴리감의 형태이다.
셋째, 절망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경우로
저자는 반항의 단계로 표현하였다. 이는 자기의 유한성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자세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신의 무한능력을 거부함으로써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심리의 형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절망은 죄이며 이러한 절망감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능하신 신에게 귀의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한계(유한성)를 인식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신의 무한성으로의 도약이 가능하게 되며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무한성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해독제의 효력이 100% 절망감을 완치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이 감정(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절망 속에 살아가는 것이고(어떠한 유형의 절망이든) 잠시 절망을 망각하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망은 가장 공포스러운 감정이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근접(近接)점에 와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한성을 가장 빠르게 깨닫고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결여를 인식하고 신에게 접촉할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이다. 다시 말하면 절망은 인간의 특권이며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절망이란 살고 싶은 몸부림에 멍든 우리 마음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인간이면 당연히 가지는 존재론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절망이란 감정이 궁금하시다면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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