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이었을까,
춘천의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책을 덮으시더니 지난 날 자신의 1980년대를 말해 주었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고 있지만 당시엔 ‘광주사태’란 표현으로 국민을 우민화했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광주를 몰랐다. 대개 언론은 광주의 폭력조직과 불량배가 시민을 선동하여 군인과 대치하고 있다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북한군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의 지휘하고 있다는 둥 지금 들으면 참으로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광주를 폄훼했다.
선생님의 80년대는 그 때의 이야기였다. 당시 신군부가 시민에게 저지른 참상과 통제된 언론, 이에 부역한 권력집단의 동조, 이를 방조한 지식인 등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왜곡되어 일반 시민에게 전해졌는지, 그 시절 대학을 다녔던 선생님은 반성의 시각으로 요목조목 설명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친구들이 거리로 나가 주검으로 돌아오는데 자신은 도서관에 남아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위하던 후회가, 살아남은 젊은 교수의 뇌리에 남아 평생을 오월의 망령 속에서 살게 하는 듯 했다.
스스로 부여한 부채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의 모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오늘 소개할 책, <소년이 온다> 역시 살아남은 자의 부책의식을 담은 대표적 작품이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로, 중학생 동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동호는 친구 정대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후,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돕는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호는 도청에 남기로 결심하고, 결국 그도 희생된다.
소설은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죽은 친구 정대의 영혼, 시신 수습을 함께했던 은숙과 선주, 투옥되었다가 살아남은 남자, 그리고 동호의 어머니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5·18의 참상과 그 이후의 트라우마를 보여준다.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은숙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고, 시민군이었던 진수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을까?
눈에는 눈이다. 당시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신군부를 하나하나 찾아내 그들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권력에 부역했던 이들을 모조리 색출해 죽음의 공포를 맛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숨김없이 밝혀 기록하고, 기념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만행 당사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죄의식으로 남아 스스로를 괴롭히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속죄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여전히 양심의 소리를 거절하고 하루살이의 인생을 선택한다면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영원한 굴레에 갇힐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수다.
그러니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그 당시 상황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기록하여, 기억하는 것이다.
많은 이가 이 책을 읽고, 당시를 기억하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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