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친구들이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다. 책장을 넘기고 있으나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수일 전부터 시집 한 권을 붙잡고 있는 터라 오늘 독후감을 쓰려면 오전 중에 읽기를 끝냈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된 노릇인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무슨 얘기로 짧은 시간을 보낼까?’에 골몰하게 된다.
여전히 친구를 만나면 설렌다. 별 새로운 것도 없는 주제에, 먹고 사는 걱정, 아이들 이야기 등 수백 번을 우려먹었던 옛이야기가 그저 즐겁다.
친구는 한 편의 시와 같다. 성장기를 함께 한 경험은 강력한 기억으로 뇌리에 저장된다. 이는 인생이란 시집에 한 편의 시가 되어 가끔 꺼내 읽으며 그때를 회상할 수 있다. 비록 그 기억이 노여움이더라도 좀 더 너그럽게 과거를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친구와 나누는 수많은 경험담은 언제나 즐거운 시와 같다. 어쩌면 내 인생의 서문은 친구를 주제로 작성될 것 같다.
보통 책에 첫 장에 쓰이는 서문은 글의 내용과 주제를 소개하는 안내문이다. 그러기에 서문은 글쓰기가 어느 정도 완성되거나 전체 줄거리를 잡고 난 후에 작성할 수 있는 글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윤동주의 서시는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이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무엇이 젊은 나이의 그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을까? 고뇌하던 ‘넘사벽’과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주어진 길’이 무엇이기에 윤동주의 서문은 이토록 부조리한가?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책 63쪽, 무얼 먹고 사나)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책 74쪽, 장)
그의 시들 중 위의 2편이 마음에 남았다.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고 삶은 고되다. 그러나 시절 인연을 따라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이는 인생의 서문을 작성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가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듯 가끔 친구와 허물없이 한때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모두에게 윤동주의 <서시>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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