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은, 무리가 가져다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 집단에서 배제되는 두려움이 ‘나’와 ‘우리’를 일원화시킨다. 많은 ‘나’가 모여 만들어 낸 ‘우리’는 강한 권력이 되어 ‘그들’을 구별한다. 무리에서 배제된 ‘그들’은 또 다른 ‘우리’가 되기 위해 포섭과 배제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외감은 대부분의 관계에 작용하여 무리를 결속한다.
이처럼 사회를 이루려는 욕구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임을 인지하면서도 ‘나’가 사라지는 모습은 깊이 우려스럽다.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선공후사의 이데올로기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국가와 개인, 학교와 학생, 회사와 직원, 가장과 자녀, 메이저와 마이너,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우리 어른들은 대물림되어 당연한 질서가 되어버린 이 습성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순응할 뿐이다. 조금만 숙고해보면 그 원인이 홀로서기의 두려움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면서도 말이다.
“장자는 혼자 다니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혼자 다니는 사람은 지극히 귀하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다니는 것은 강자의 행동이다.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필수록, 마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과 어울려야 안심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쓴다. 내면과 실력이 강한 사람들은 혼자 다니기를 겁내지 않고 그 시간을 즐길 줄 안다. (책 123쪽)
중문학의 아버지 루쉰은 “맹수는 홀로 다니고, 소와 양은 무리를 짓는다.”라고 말했다. 쓸데없는 사교활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 내 세상이 넓어진다. (책 124쪽)
“혼자 다니는 것이 성격이 거칠고 포악해서도, 건방져서도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마음의 선택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책 125쪽)
사회의 존재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내가 없는 사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무리의 힘을 의지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여전히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진 공공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정의롭다고 할 순 없다. 그러기에 저항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사회가 불의로 향할 때, 그 불의에 항거할 힘을 길러야 한다.
인간은 외로움을 느낄 때 자신을 찾게 된다. 그때가 되면 내면의 나와 대화할 수 있고, 현상의 진정한 의미를 살피려는 노력으로 통찰에 접근할 수 있다. 각각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쫓아 그 근원과 과정을 탐구하여 쓸모를 정의한다. 따라서 모든 ‘나’는 홀로서기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는 나다움의 결합으로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서로 다름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의지하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은 우리의 숨통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자신을 지킬 용기가 생기며 더욱 성장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면 (내 생각대로 행동하고 싶다면) 먼저 강해져야 한다.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음을 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설 만큼 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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