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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 오지랖 넓은 호구가 사무치게 그립거든,

by 박종인입니다.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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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먼, 글겄냐!’,
‘아버지는 누가 등쳐먹는 호구가 아니라 자원한 호구였다.’,
‘사무치게 그립다.’

위의 세 문장 중 앞의 두 문장은 주인공(아버지)의 것이며, 마지막 문장은 화자(딸)의 것이다. 이 세 개의 문장을 결합하면 인생이 된다. 우리의 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다.

이 세 문장은 소설이 내게 남겨준 과제였다. 이 문장 사이에 공간을 채워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하는 숙제였다.

‘오죽했으면,’에는 결과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자기 위로를 함축한 이 표현은 뒤에 올 문장이 부정적일수록 그 의미를 더한다. 정확히 말하면, 발생한 결과가 직접 체험한 내용일 때, 그 고통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경험의 언어이다. 그래서 ‘오죽했으면’이란 표현은 아버지의 연륜이 돼서야 그 의미를 공감할 수 있는 용어이다.

‘자원한 호구’란 스스로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을 나타낸다. 죽을 줄 알면서 맹수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죽음 이상으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예상되는 손해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이든,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이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족이든, 남에게 속을지언정 스스로는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을 때, 용기 내어 호랑이의 아가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무치게’란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어 발끝 모세혈관까지 미치는 감정의 전달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것은, 가슴이 저리고 손발 끝의 말초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보고 싶은 감정이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언제든 다가설 수 있는 존재에게는 느낄 수 없는, 그 대상이 기억의 저편에 있어 만지고, 느끼고, 바라볼 수 없는 때 감당해야 할 애타는 마음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란 거친 시선을 마음으로, 몸으로 막아서며 버텨온 인물이다. 자신의 아픔만큼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위인이었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간섭하는 오지랖 넓은 어른이었으며, 모든 이를 평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인본주의자였다. 아내의 동지이자 딸바보 아빠였다.

상호(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오죽했으먼,’을 달고 산 ‘호구’였다.

딸은 아버지가 더는 함께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서야 지난날의 아버지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녀의 삶엔 언제나 아버지가 존재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버지는 언제나 그녀의 그림자로 함께 했다. 아버지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힌다.

아버지의 오지랖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허물없이 그의 삶을 추모하며 마지막을 지켰다. 아들 같았던 학수와 함께, 손녀 같았던 노랑머리와 함께, 아버지의 유골을 날려 보냈다. 참이나 고단했을 그의 일기를 마무리하며, 딸은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상호는 우리의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혈기 왕성했고,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허물이 있었던, (그 허물로 언제나 가족에게 미안해했던) 고집 센 노인이다.

자식이 그렇게 부모가 되듯, 결국 (우리는) 다를 것 같았던 그 존재가 되는 것이 천연계의 원리이다. 혹시라도 오지랖 넓은 호구가 사무치게 그립거든, 우주가 보내는 신호로 여기고 맘껏 추억해 보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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