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는 소문에 동구(洞口)에 올라보니
봄꽃을 떨구며 봄날이 간다.
떠나는 발걸음이 아쉬워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보지만
갈 봄 기약 없이 꽃잎만 남기고
그렇게 간다.
(중략)….
며칠 전, 벚꽃 구경을 위해 인천의 오래된 공원에 올랐다. 평일 저녁인데도 상춘객(賞春客)으로 채워진 수봉산에는, 아쉽게도 만개한 지 수일이 지난 벚꽃만이 남아있었다. 몇 안 남은 꽃봉오리지만, 가는 봄날의 아쉬움을 달래며 그때의 감정을 몇 자 적어 보았다. (아마 이번 주 읽었던 김소월의 시선집 영향이리라) 시를 읽고, 시 한 편 읊조리는 것이 뭐, 그리 사치스러운 행위이겠냐마는 비밀스레 작성하던 일기를 펼친 듯 쑥스럽다.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전자책 28~29쪽)
고향
짐승은 모를는지 고향인지라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 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행입니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봄이면 곳곳이 산새소리
진달래 화초 만발하고
가을이면 골짜구니 물드는 단풍
흐르는 샘물 위에 떠나린다
바라보면 하늘과 바닷물과
차 차 차 마주 붙어 가는 곳에
고기잡이배 돛 그림자
어기엇차 디엇차 소리 들리는 듯
떠도는 몸이거든
고향이 탓이 되어
부모님 기억, 동생들 생각
꿈에라도 항상 그곳서 뵈옵니다
고향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마음속에 고향도 있습니다
제 넋이 고향에 있습니까
고향에도 제 넋이 있습니다
마음에 있으니까 꿈에 뵈지요
꿈에 보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그곳에 넋이 있어 꿈에 가지요
꿈에 가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물결에 떠내려간 부평줄기
자리 잡을 새도 없네
제자리로 돌아갈 날 있으랴마는!
괴로운 바다 이 세상에 사람인지라 돌아가리
고향을 잊었노라 하는 사람들
나를 버린 고행이라 하는 사람들
죽어서만은 천애일방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
(전자책 42~44쪽)
꿈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이르는 말이야 있지 않은가,
그러하다, 봄날은 꿈꿀 때.
내 몸에야 꿈이나 있으랴,
아아 내 세상의 끝이여,
나는 꿈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전자책 62쪽)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저무는 봄 저녁에 져가는 꽃잎,
져가는 꽃잎들은 나부끼어라.
예로부터 일러 오며 하는 말에도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그러하다, 아름다운 청춘의 때에
있다던 온갖 것은 눈에 설고
다시금 낯 모르게 되나니,
보아라, 그대여, 서럽지 않은가,
봄에도 삼월의 져가는 날에
붉은 피같이도 쏟아져 내리는
저기 저 꽃잎들을, 저기 저 꽃잎들을
(전자책 110~111쪽)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전자책 144쪽)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전자책 172~173쪽)
진달래꼿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부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전자책 174~175쪽)
초혼
산신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전자책 180~181쪽)
짧은 언어에 방대한 의미를 담아, 읽는 이마다 각자의 해석을 낳게 하는 마술!
시가 인류와 함께한 것은 곤고한 우리의 삶을 위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선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 그 딱함을 먼저 경험하여야 한다. 그래야 약발이 먹힌다. 관념 속에 허우적거리는 언어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절망에 찌들어봐야 그 깊이를 논할 수 있고, 외로움에 처절히 숨 막혀봐야 그 두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다. 굶주려보지 않고 어찌 배고픈 설움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는 위대하고, 시인은 고달프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위대한 시인과의 만남을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보다 시적 감각을 지닌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두의 마음에 아름다운 시상이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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