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점심, 장모님께서 배달 음식을 담았던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봄 쑥과 돌나물을 수북이 담아 오셨다. 예전 같으면 ‘감사합니다!’하고 냉장고로 직행했을 재료들을 오늘은 바로 된장 한 숟가락을 풀어 봄 향기 가득한 쑥국을 끓였고, 초장에 참기름을 조금 넣고 돌나물을 무쳐 흰 쌀밥과 함께 최상의 궁합을 이룬 호강을 누렸다.
어릴 적, 쑥이며 냉이, 뭐 이런 봄나물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언제든 캐 먹을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간혹 많은 양이 필요할 때면 허리춤에 호미를 쑤셔 넣고 낡은 포대와 함께 할머니를 따라 나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한다.
봄, 흙, 꽃, 나무, 할머니,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박완서 작가의 <호미>가 생각난다. <호미>는 산문집이다. 작품은 ‘글’임에도 ‘말’처럼 다가온다. 현대의 단어를 사용함에도 오래 묶은 과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선생님의 글을 옮겨 본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중,
“나무들은 잎을 떨군 후가 더 늠름하고 큰 나무일수록 계절과는 상관없이 당당하다.” <만추> 중,
“호미는 남성용 농기구는 아니다. 주로 여자들이 김맬 때 쓰는 도구이지만 만든 것은 대장장이니까 남자들의 작품일 터이나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 (중략)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호미> 중,
“네 친정에선 그렇게밖에 못 배웠냐는 소리가 가시가 되어 죽는 날까지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지만 한 번도 정은 준 적이 없었다는 이가 있다. 요즈음 세상에도 시어머니 자리는 새겨들을 만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딸의 아빠, 아들의 엄마> 중,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들 무렵의 밥 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선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강된장과 호박잎쌈> 중에,
“네가 시집가서 원고 심부름을 전처럼 만만하게 시킬 수 없게 되자 팩스라는 편리한 전송수단이 생기고 지금은 더 편리한 인터넷을 쓰고 있지만, 엄마가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편리한 기계에 빨리 익숙해진 것도 너 대신 나의 사회성 부족을 메워줄 대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고 걱정거리를 털어놓는 일은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딴 누구도, 네 동생들도, 나의 친한 친구도 너만큼 해줄 수는 없단다. 근심이 생겨 너한테 털어놓을 말을 머릿속으로 굴리기만 해도 근심의 반은 사라지고, 미운 사람 욕을 너한테 하고 나면 미움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작가의 글은 다양한 주제인 듯하지만,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 여행을 통해 경험한 사건, 가까운 지인에게 전하는 소식, 딸에게 보내는 당부 등 누구에게나 있을 흔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특히 <이이화의 ‘역사하는 태도’>와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깊은 감명이 있었음을 밝힌다.
봄이 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봄이 왔다. 여전히 겨울인 줄 알았는데 봄이 왔다. 어느 벗의 말처럼 인간의 힘으로 달력 한 장도 바꿀 수 없다고 하더니, 4월이 되니 따뜻한 봄이 왔다. (역병과 전쟁의 끝이 보인다.)
팍팍해진 나의 마음에도 봄날이 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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