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연시인의 에세이집이 나왔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참 좋다.’ 고상하고, 다정하며, 편안하다.
자기 자비(慈悲),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말이다. 자비란 보통 타인에게 베푸는 나의 자혜로운 행동이 아니던가? 작가는 이를 두고 하드코어 자기 반성문이라 표현한다.
작가의 자기 반성문은 어릴 적 거짓말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장래 희망이 ‘멋있는 남자’였던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살면서 참 많은 잘못을 했다. 귀를 열어야 할 때 입을 열었고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했고 훔쳐봤고 사용했다. 다정해야 할 때 나는 냉정했고 약속을 어긴 날에도 항상 숙면을 취했다. 사랑은 내가 필요한 만큼만 했고 이별은 항상 내가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무심히도 내뱉은 누군가의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조연의 삶을 살았다면? 내 생각과 행동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인데, 가면을 속에 감춰진 진짜 얼굴을 보이고 나를 찾기 위한 욕망이 글 속 여러 곳에 녹아 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원태연이 되고 싶었다. 더 유명하고 더 대접을 받고 더 잘나가고 더 많은 일들을 해치워 나가면서도 마치,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이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사는 척, 하면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결국 혼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외로움은 피부 속에 산다. 비가 오는 날 알 수가 있었다. 외로움은 친구가 없다. 바람 부는 날 알 수가 있었다. 외로움은 말이 없다. 눈이 내리는 날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가끔 외로움이 꼭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난 외로움이 내 마음속에서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 헤어진 다음 날부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릴 때마다 내 마음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커피는 쓰고, 너는 달고, 나는 영원히 살고 싶었지.”
잔,
“유리잔, 사랑. 부르는 순간 스스로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 조심조심, 그 전에 깨뜨릴 수도 있어.
깨진 잔, 외로움. 아무리 채워봐도 그 순간뿐이지.
작은 잔, 고독. 느닷없이 불쑥, 흘러넘치지만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친구라고 생각해도 좋아.
커다란 잔, 그리움. 간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에서 깊은 고독 속을 헤매게 만드는 부질없는 수고스러움.
일회용 잔, 인생. 네가 원하는 대로 멈췄다 다시 시작하지 않아.
버려진 잔, 상처. 내가 왜 웃지도, 울지도 않는지 알아? 심장에 보톡스를 맞았거든, 그것도 굉장히 헤비한 걸로,
삼페인 잔, 결혼. 사랑은 작은 추억이 모여 만들어지는 거야. 서로의 잘못을 잊을 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
남의 잔, 탐욕. 여보게, 정신 차려 이 친구야.
눈물의 잔, 추억. 난 슬플 땐 설탕물을 마셔. 포도당은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거든,
막잔, 거짓말. 모두의 거짓말.
자작, 후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제일 비겁한 사치.
물 한잔, 숙취. 가끔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가득 차 있는 잔, 교만. 희망을 잃어버린 괴물들.
첫 잔, 여행. 미지와의 조우. 비행기를 놓치는 건 무섭지 않아, 멤버가 중요하지.
식어가는 커피 잔, 이별. 주는 쪽 받는 쪽 모두 상처를 입기 쉽다.
딱, 한 잔, 미련.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백사장 하얀 모래.
그때 그 잔, 안녕. 죽을 때까지 못 잊을.
빈 잔, 닥쳐.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해.”
내 편,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이 책이 얼마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김밥천국 소고기김밥보다는 분명히 더 비쌀 텐데 얼마나 고맙겠어요. 내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웃어요. 여기까지 읽은 당신도 여기까지 쓴 나도 그냥 한 번 웃어요. 기쁠 때만 웃지 않잖아요. 우리 그렇게 살지 않았잖아요.”
원태연 시인의 글은 여전히 쉽고 솔직하다. 시는 짧은 단어 속에 긴 삶을 함축하고 있기에 다소 동떨어질 수 있지만 그의 글은 꼬임이 없어 바로 접하여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다정한 글이다.
군더더기 없는 좋은 글이다.
많은 분들이 읽고 따뜻함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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