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참았던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마구 흩어져 있던 지식의 조각들이 큰 퍼즐 판을 채워가며 한 편의 그림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즐거움에 반해 에덴동산의 선악과(Wisdom tree)를 따먹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여전히 구속된 자유에서 살아가고 있음이리라.
우주의 탄생으로 글은 시작된다.
최초의 텅 빈 공간은 양자 요동을 통해 물질의 입자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생성된 물질은 계속된 압축과 폭발로 끝없는 인플레이션 과정을 통해 지금의 우주로 팽창한다.
관념 속에만 존재하던 우주는, 관측 장비의 발달과 이로 인해 얻게 된 다양한 자료들, 이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 138억 년이란 시간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더불어 오직 인간의 의식과 사유를 통해서만 우주는 세계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우주를 첫 꼭지로 잡은 이유를, 세계와 자아의 관계가 인간이 가장 궁금해 하는 기본 주제이며 그 시작으로 우선 세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우주가 시작되고 92억년이 지난 후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행성인 지구가 탄생한다.
지구는 46억년의 역사를 가지며 세 번의 큰 지질시대를 지낸다. 그중 마지막 시대인 현생 누대에 바다와 육지에 생명체의 흔적이 발견된다. 현생 누대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쥐라기 시대가 이중 중생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지구 탄생과 함께 생명 발생의 메커니즘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류의 탄생으로 안내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호모 에렉투스 거쳐 인류의 최종 단계인 호모 사피엔스들이 강과 해안선을 따라 지구 전체로 펴져나간 이동 경로를 설명한다.
이는 인류의 문명을 이루게 된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인도로 이주한 아리아인은 그들의 책, <베다>와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 인류가 가지고 있던 우주와 자아에 대한 관념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나타내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과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맞춰주는 현명한 답을 제시한다.
이는 힌두교 세계관의 근본 구조인 다르마(우주의 질서)와 카르마(자아의 질서)의 합일로 계승된다.
중국문명의 시작과 함께
탈속적 무위을 강조한 노자의 도(道)와 덕(德)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도는 우주의 진리를 나타내며, 덕은 개인의 내면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세속적 참여를 유도하며 인(仁)의 덕목을 실천한 공자의 사상을 설명한다. 노자와 공자의 가르침은 후대에 도가와 유가 사상으로 계승되는데, 둘의 사상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탈속과 세속,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욕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여기에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등장하면서 도가와 유가가 제시하지 못한 현생 너머의 세계관을 전파하게 된다.
깨달음을 얻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상적 연결고리가 된다. 그의 사상은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직시하고 고통의 원인으로서의 무명과 갈애를 이해하며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 이러한 열반에 이르는 길로서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함을 말한다. 이 외에도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緣起)와 오온(五蘊)으로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대 서양의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유럽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다. 이 오래된 문명은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데, 에게 문명, 암흑기,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이 그것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한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면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를 설명하면서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상대방을 교정하고 교화하려는 사고를 정당화하며 역사적 비극이 되었다. 이후 칸트에 이르러 초월적 관념론을 제시하면서 길게 이어져오던 이원론적 패단을 극복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철학과 함께 서양 사상의 양대 뿌리가 되어준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세계사적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지배 시절에 등장한 예수라는 인물은 유대 민족에게는 역사적 선생이었고 죽음 후 부활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통해 초월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그의 제자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지위가 구체적 개인에서 초월적 보편으로 격상되는 사상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교회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저자가 에필로그에 남긴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
각 시대의 위대한 선생들이 우리 후대에게 전하려했던 가르침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이다.
우주의 시작, 지구와 인류의 탄생, 문명의 발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명하는 저자의 노고에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태어난 우리들에게, 반대쪽 세계를 볼 수 있기 바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책의 제목이 왜 제로인지, 절로 동감하게 되는 시점이다.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오가며, 저자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옮겨보고 있다.
우주의 탄생부터 오늘 날까지 전해지는 사상의 큰 줄기를 인식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 읽기가 이렇게 즐겁긴 오랜만이다.
버스요금을 지불하고 비행기를 탄 느낌이랄까?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들도 나처럼 즐거웠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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