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가슴 시리도록 차가운 회색빛 담벼락 위에
우리 심장의 더운 피를 뽑아 쓴 숫자,
79.
행복동을 날던 그 까마귀는
어느덧 우리 집 머리 위에서 내 죽음을 기다리는 듯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추위의 쓰라림을 모르던 나의 흰 손가락 사이로
이젠,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집 잃은 생쥐 한 마리가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시동을 걸고 출발을 기다리는 타이탄 트럭 위에는
그동안 정성스레 모아논 그릇이며, 철학 책이며, 옷가지 등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잠시 후 작별할 주인 없는 나의 집은
왜 그렇게 따듯했는지?
고등학교 때 의미 없이 지나쳤던 국어시간이
내 막막한 가슴을 울린다.
그래도 난 이 79번이라는 공간에서
존재의 가치를 배웠다.
남들이 말하는 사랑과 행복을 느꼈다.
날이 저문다.
79.
나의 좌절과 시련이 되었던 이 작은 공간에서
푸르른 들꽃을 뽑아
나와 함께 타이탄에 실었다.
자, 가자!
또 다른 회색촌으로,
가서 이 들꽃을 심자.
다시는 뽑히지 않을 그 자리에
희망의 씨앗을 심자.
(1999.10.24. 얼마 후면 허물어질 구월동 철거촌의 79 주택을 떠나며)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