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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by 박종인입니다. 2023.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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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중앙 시장 골목

 

가슴 시리도록 차가운 회색빛 담벼락 위에

우리 심장의 더운 피를 뽑아 쓴 숫자,

79.

행복동을 날던 그 까마귀는

어느덧 우리 집 머리 위에서 내 죽음을 기다리는 듯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추위의 쓰라림을 모르던 나의 흰 손가락 사이로

이젠,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집 잃은 생쥐 한 마리가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시동을 걸고 출발을 기다리는 타이탄 트럭 위에는

그동안 정성스레 모아논 그릇이며, 철학 책이며, 옷가지 등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잠시 후 작별할 주인 없는 나의 집은

왜 그렇게 따듯했는지?

고등학교 때 의미 없이 지나쳤던 국어시간이

내 막막한 가슴을 울린다.

그래도 난 이 79번이라는 공간에서

존재의 가치를 배웠다.

남들이 말하는 사랑과 행복을 느꼈다.

날이 저문다.

79.

나의 좌절과 시련이 되었던 이 작은 공간에서

푸르른 들꽃을 뽑아

나와 함께 타이탄에 실었다.

자, 가자!

또 다른 회색촌으로,

가서 이 들꽃을 심자.

다시는 뽑히지 않을 그 자리에

희망의 씨앗을 심자.

(1999.10.24. 얼마 후면 허물어질 구월동 철거촌의 79 주택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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