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자체와 싸우는 것보다, 권력을 의심 없이 따라가는 태도와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노암 촘스키
제1장: 멸균된 수족관
<프로비던스(Providence)>의 아침은 언제나 소독된 메스처럼 예리하고, 섬뜩할 정도로 조용하게 시작된다.
서울 강남 한복판, 테헤란로의 스카이라인을 찢고 솟아오른 48층짜리 통유리 타워. 이 거대한 유리성(城)은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서울의 매연과 소음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대신 코끝을 찌르는 것은 미세하게 정제된, 비릿할 정도로 차가운 인공 산소의 냄새였다. 습도 45%, 온도 23도. 인간이 가장 효율적으로 노동할 수 있다는 최적의 수치로 고정된 이 공기는, 내게 있어 숨결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포장재처럼 느껴졌다.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감정이 거세된 영원한 봄. 나는 이 완벽한 평온함이 구역질 났다. 마치 거대한 포르말린 병 속에 갇힌 표본이 된 기분이었다.
오전 8시 50분. 나는 3층 로비의 대리석 기둥 뒤에 서서 출근하는 직원들을 관찰했다.
감사팀 과장 노민호. 내 명함에 박힌 직함은 이 거대한 기계가 오작동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내가 매일 아침 확인하는 것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라,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들의 마모 상태였다.
수백 명의 직원이 투명한 회전문이 쉴 새 없이 삼켜대는 아가리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균일했다. 남성들의 빳빳하게 다림질 된 슈트, 여성들의 흐트러짐 없는 정장,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코팅된 ‘표준 미소’. 월요일 아침 특유의 권태나 숙취, 짜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매끄럽게 빛났지만, 그 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영혼과 자의식을 건물의 로비 입구에 맡겨두고 입장한 마네킹들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을 문질렀다. 5년 전, 건설 현장 안전 관리자로 일하던 시절의 습관이었다.
“규정대로 다 따지면 공기(工期)는 누가 맞추나? 좋은 게 좋은 거야. 눈 좀 감아.”
현장 소장의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 침묵의 대가로 내 입사 동기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후배 수진이 죽었다. 무너져 내린 자재 더미 아래서 삐져나온 그녀의 하얀 운동화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사고가 ‘작업자 부주의’로 덮이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나는 배웠다.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유예된 살인이라는 것을. 권력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아니라, 그 폭력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수많은 방관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프로비던스>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침묵의 성소였다.
또각, 또각, 또각.
수백 명이 움직이는데도 들리는 것은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규칙적인 스타카토뿐이었다. 누구도 잡담하지 않았다. 누구도 웃지 않았고,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완벽한 효율의 세계. 이곳에서 불필요한 소음은 죄악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엘리베이터 홀 중앙 벽면을 바라봤다. 가로 5미터, 세로 3미터의 거대한 디지털 사이니지가 서늘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회사는 매일 아침 ‘오늘의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전 사원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 어제 문구는 ‘혁신은 멈춤 없는 질문에서 시작된다’였다. 꽤 그럴싸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 화면에 뜬 문장은 정반대였다.
<의심은 효율성을 저해하는 가장 큰 바이러스다.>
간결한 고딕체. 어제는 질문하라더니, 오늘은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명백한 모순이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지침에 대해 누군가는 반응해야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옆 사람에게 “이거 말이 안 되지 않아?”라고 속삭이거나.
그러나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수십 명의 엘리트 중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전광판을 보았지만, 읽지 않았다. 그들에게 저 문구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하루 자신들이 입어야 할 유니폼의 색깔 같은 것이었다. 배치되어 있기에 수용하는 것. 그 무해하고 순종적인 얼굴들을 보며 나는 위산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노 과장님, 안 올라가십니까? 58분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인사팀 주리혜 대리였다.
입사한 지 겨우 3개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내에서 ‘걸어 다니는 인사 규정집’이라 불릴 만큼 유능했고, 누구에게나 과할 정도로 친절했다. 그녀 역시 다른 직원들처럼 완벽한 정장 차림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껄끄러웠다. 그녀의 웃음은 눈가에 주름을 만들지 않았다. 그녀의 친절은 어딘가 기계적이었고, 때로는 상대를 분석하는 듯한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먼저 올라가요, 주 대리. 속이 좀... 안 좋아서.”
나는 짐짓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대답했다. 주리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내 불안한 시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공기가 너무 맑아서 그런가 봐요. 여기선 숨 쉬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 통제받는 기분이잖아요? 가끔은 질식할 것 같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상냥했지만, 그 내용은 내 내면의 독백을 그대로 읊조린 것이었다.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농담입니다. 좋은 아침 되세요, 과장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인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수조 밖의 관찰자가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감정 없는 호기심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그 말은 단순한 농담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숨기고 있는 반골 기질을 간파했다는 경고였을까. 확실한 건, 이 멸균된 수족관 안에 균열을 감지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2장: 파블로프의 개들
오전 11시 30분. 점심시간의 구내식당은 거대한 사육장과 다름없었다.
<프로비던스>의 구내식당은 미슐랭 셰프가 조리한 최고의 음식을 제공했다. 직원들의 건강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별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식단. 맛은 훌륭했지만, 식사 시간 특유의 소란스러운 활기는 거세되어 있었다. 수백 개의 입이 오물거리는 소리, 스테인리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달그락, 달그락. 그 소리가 마치 건조한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려 나는 식욕을 잃었다.
나는 식판을 들고 창가 자리를 향해 걸었다. 데이터 분석 3팀의 김 대리가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오늘 오전, 내가 감사 로그에서 발견한 기이한 작업의 당사자였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자리, 비었죠?”
김 대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입안 가득 밥을 문 채, 그는 눈만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넵. 과장님. 앉으십쇼.”
나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아까 정기 감사 로그를 좀 봤어. 지난달 14일 기록이요. 데이터 삭제하고 복구하는 작업, 닷새 동안 세 번 반복했더군요?”
김 대리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아... 그거요.”
“수 테라바이트나 되는 핵심 데이터를 오전에 지우고, 다음 날 다시 복구한다? 그것도 세 번이나? 이건 명백한 리소스 낭비야. 백업 서버 부하도 심했을 텐데. 왜 그랬나?”
나는 그의 입에서 불평이 나오길 기대했다.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 ‘미친 짓인 줄 알지만 까라면 까야죠’ 같은 인간적인 투덜거림.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대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시스템 최적화를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과장님.”
“뭐?”
“삭제 후 복구 과정에서 데이터의 정합성(Integrity)을 검증하는 테스트였을 겁니다. Q가 의미 없는 지시를 내릴 리 없으니까요. 저희는 그 깊은 뜻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따르는 게 맞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삽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그 비합리성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스스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신앙 간증에 가까웠다.
“의심해 본 적 없어? 오류일 수도 있잖아. Q도 결국은 프로그램이야.”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졌다. 주변의 몇몇 직원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 대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나를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이방인처럼 쳐다봤다.
“과장님. 의심은... 피곤한 일입니다.”
“피곤해?”
“네. 의심하면 질문해야 하고, 질문하면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만약 제가 이의를 제기했다가 진짜 중요한 테스트를 망치면 어떡합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결과가 잘못돼도 시스템이 책임져줍니다. 그게 편하잖아요.”
그는 남은 밥을 국에 말아 허겁지겁 삼켰다. 마치 나의 질문을 씹어 삼키듯이.
“편안함. 그게 우리가 이 회사에 다니는 이유 아닙니까.”
그는 식판을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붐비는 식당 한복판에서 완벽한 고립감을 느꼈다. 김 대리의 얼굴에서 나는 5년 전, 현장 소장의 지시를 묵인하던 내 비겁한 안도감을 보았다.
권력은 총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위험한 일인지 학습시켜, 자발적으로 뇌를 반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프로비던스>가 완성한 통치술이었다.
나는 식판을 반납구에 밀어 넣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인공 조경으로 꾸며진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구역질을 참으며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빌딩 숲, 저 아래를 기어가는 개미 같은 자동차들.
“맞는 말이에요. 편하잖아요, 생각 없는 노예로 사는 거.”
서늘한 목소리. 주리혜였다.
그녀는 언제 다가왔는지 내 옆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손에는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당신... 내 말을 엿들었나?”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엿들은 게 아니라, 들린 거죠. 과장님 목소리엔 항상 분노가 섞여 있으니까. 이 죽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잡음(Noise)이랄까.”
그녀가 내게 차가운 캔커피 하나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손바닥에 닿은 알루미늄의 냉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원래 인사팀은 직원들 뒷조사나 하고 다니나?”
“뒷조사가 아니라 관찰이죠. 저는 오랫동안 찾고 있었거든요. 이 미친 시스템에 ‘왜?’라고 묻는 사람을.”
리혜가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보여주었던 기계적인 친절함은 사라지고, 날카롭고 위험한, 어쩌면 광기마저 서린 눈빛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김 대리 같은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나요? 아니면 혐오스러운가요?”
“...둘 다.”
“저들은 피해자가 아니에요, 과장님. 공범이죠. 자신들의 자유를 시스템에 갖다 바치고, 그 대가로 ‘책임 없는 삶’이라는 마약을 얻은 중독자들이에요.”
그녀의 말은 잔인했지만, 정확했다. 내 폐부를 찌르는 통찰이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단순히 인사팀 대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파수꾼이라고 해두죠. 당신처럼, 잠들지 못하는.”
그녀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번뜩이는 작은 저장 장치.
“이번 주 금요일 밤, 전 사원 워크숍인 거 아시죠? 건물은 텅 빌 겁니다. 보안 시스템도 최소화되죠.”
“그래서?”
“48층 서버실. 그 금단의 구역에 들어가 볼 기회예요. 우리가 매일 아침 경배하는 저 ‘Q’라는 존재가 진짜 신인지, 아니면 우리를 비웃고 있는 괴물인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녀의 제안은 달콤한 독배 같았다. 상식적인 직장인이라면 거절하고 신고해야 했다. 하지만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수진의 죽음 이후, 다시는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밤들이 떠올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난간 위의 USB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의 지문을 파고들었다.
“좋아. 확인해 보자고.”
나의 대답에 주리혜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그것은 환영의 미소가 아니라, 실험 쥐가 덫을 물었을 때 짓는 관찰자의 미소였다.
제3장: 심연으로의 하강
금요일, 오후 9시.
워크숍 출발을 위해 전세 버스들이 직원들을 싣고 떠났다. 텅 빈 사무실에는 오직 서버가 돌아가는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유령의 숨소리처럼 감돌았다.
나는 퇴근하지 않고 감사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USB가 마치 뜨거운 석탄처럼 허벅지를 데우는 것 같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걸리면 해고는 물론이고 형사 고소감이야.’
이성이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 대리의 멍한 눈동자, 그리고 5년 전 수진의 싸늘한 시신이 떠올랐다. 이 거대한 유리성 안에서 나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육체는 살아있지만, 정신은 질식사하기 직전이었다. 확인해야 했다. 내가 따르는 권력의 실체를.
밤 10시. 사무실 입구의 자동문이 열렸다. 주리혜였다.
그녀는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닌, 검은색 후드 티와 편안한 카고 바지 차림이었다. 발소리를 죽인 그녀가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준비됐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보안을 뚫을 수 있습니까? 48층은 생체 인식 시스템일 텐데.”
“걱정 마세요. 인사팀 데이터베이스에는 죽은 자들의 정보가 넘쳐나니까요. 퇴사한 임원, 사망한 이사... 그들의 생체 정보를 재조합해서 ‘유령 키’를 만드는 건 제 전공이거든요.”
그녀는 손에 든 흰색 ID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아무런 인쇄도 되어 있지 않은, 기묘한 백색 카드였다.
“이걸 쓰는 순간, 우리는 돌아올 수 없어요.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라, 시스템의 침입자가 되는 거예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리혜가 나를 시험하듯 물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이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권력은 침묵하는 자들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고 했어. 나는 더 이상... 먹이가 되고 싶지 않아.”
내 대답에 리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내려가죠. 심연의 바닥부터 훑고 올라가는 게 순서니까.”
우리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형광등이 꺼진 복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상유도등의 초록색 불빛만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48층으로 가기 전, 우리는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된 화물용 승강기를 타야 했다. 중앙 엘리베이터는 모든 기록이 남기 때문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지하 2층. 적막 속에 기계실 펌프 돌아가는 소리만이 쿵, 쿵, 심장 박동처럼 울렸다.
“노 과장님.”
앞서 걷던 리혜가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이곳 지하가 왜 이렇게 깊은 줄 아세요? 이 건물의 화려한 48층을 지탱하기 위해서예요. 위가 높을수록, 아래는 더 깊고 어두워야 하죠. 권력도 마찬가지예요. 저 꼭대기의 ‘Q’가 빛나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바닥의 어둠이 침묵해 줘야 해요.”
그녀는 화물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낡은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소리가 마치 괴물의 아가리가 벌어지는 소리 같았다.
우리는 승강기에 탔다. 리혜가 흰색 카드를 리더기에 대자, 층수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47’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가 덜컹거리며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중력이 내 몸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위로 올라가고 있지만, 기분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지하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유리성의 꼭대기,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오늘 밤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제4장: 눈먼 파수꾼
승강기는 47층에서 멈췄다. 딩- 하는 맑은 도착음이 고요한 승강기 내부를 울렸다. 그것은 마치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종소리처럼 들렸다.
문이 열리자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복도 끝, 48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 입구에는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깐.”
리혜가 내 팔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아귀 힘이 의외로 강했다. 우리는 복도 모퉁이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나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내밀어 불빛 쪽을 살폈다.
보안 데스크였다. 전 사원 워크숍이라 텅 비어 있어야 할 건물에, 당직 경비원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희끗한 머리의 남성이었다.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그의 허리춤에 찬 무전기와 보안봉은 분명한 위협이었다.
“어쩌지? 우회로는 없어. 저길 지나야 48층 계단이야.”
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냥 지나가요.”
리혜는 태연하게 후드를 벗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미쳤어? 잡히면 끝장이야. 무단 침입으로 경찰 부를 텐데.”
“아뇨. 저 사람은 경찰을 부르지 않을 거예요. 아니, 부르지 못할 거예요. 저를 믿으세요, 과장님.”
그녀의 눈빛에는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보안 데스크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그 당당한 발소리에 나는 얼어붙었다가, 어쩔 수 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가 울리자 졸고 있던 경비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이 우리를 발견하고 크게 뜨였다.
“누, 누구십니까? 오늘은 전 사원 워크숍이라 출입 통제입니다만!”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춤의 무전기에 손을 올렸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뛰고 있었지만, 주리혜는 마치 자기 집 안방을 걷듯 침착했다.
“Q-774 긴급 점검 명령 수행 중입니다. 인사팀 주리혜 대리, 감사팀 노민호 과장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무적이고 건조했다.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그 ‘하얀색 카드’를 꺼내 경비원 앞의 리더기에 갖다 댔다.
삑-
기계적인 비프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승인되었습니다. 접근 등급: A-Class]
경비원은 모니터 화면과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긴급 점검이라면 사전에 통보가 왔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의 복장은 업무용이라기엔 너무 가벼웠고,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다. 결정적으로, 리혜가 쓴 카드는 퇴사한 임원의 데이터를 재조합한 것이었다. 모니터에 뜬 사진(아마도 늙은 남성의 얼굴)과 눈앞의 젊은 여성의 얼굴은 명백히 달랐을 것이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장 우리를 제압하거나 지원 요청을 해야 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가 무전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달려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경비원의 손가락은 무전기 위에서 멈췄다.
그는 모니터의 ‘승인’이라는 녹색 글자와, 당당하게 서 있는 리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그것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책임’에 대한 공포였다.
‘만약 내가 이들을 막았는데, 정말 시스템 오류로 사진이 잘못 나온 거라면? 정말 Q의 긴급 명령을 수행하는 높은 분들이라면? 내가 감히 그 앞길을 막았다가 해고라도 당하면?’
그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계산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눈(리혜의 얼굴)보다 시스템의 판정(승인 메시지)을 더 신뢰하고 싶어 했다. 판단을 기계에 외주 주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아... 시스템 승인이 떴군요.”
마침내 그가 무전기에서 손을 뗐다. 곤란한 표정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기계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겠죠. 사진 데이터가... 업데이트가 안 됐나 봅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수고하십시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펼쳐져 있던 잡지 뒤로 시선을 숨겼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린 파수꾼.
우리는 그를 지나쳐 48층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을 올랐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봤죠?”
앞서가던 리혜가 계단 난간을 잡으며 피식 웃었다.
“그게 바로 ‘맹목의 알고리즘’이에요, 과장님. 그 사람은 무능한 게 아니에요. 단지 책임을 지기 싫은 거죠. 시스템이 들여보냈다는 핑계만 있으면, 악마가 들어와도 문을 열어줄 사람이에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졸기 시작한 경비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5년 전, “좋은 게 좋은 거야”라며 안전 규정을 무시했던 현장 소장의 등짝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권력은 감시자가 강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감시받는 자들이 스스로 눈을 감아주기 때문에 유지된다. 저 경비원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거대한 사기극을 지탱하는 가장 충실한 부역자였다.
“자, 다 왔어요.”
리혜가 멈춰 섰다. 계단 끝, 육중한 회색 강철 문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문패도, 번호도 없는 문. 이 너머에 우리를 옭아매는 유령, ‘Q’가 있다.
리혜가 가방에서 노트북과 연결된 케이블을 꺼내 도어락 포트에 꽂았다.
“이 문만 열리면, 과장님이 직접 확인하세요. 우리가 무엇에 복종하고 있었는지.”
타닥타닥. 리혜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계단실을 울렸다.
철컥-
육중한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문이 천천히, 아주 무겁게 열렸다. 쏟아져 나오는 차가운 냉기가 내 얼굴을 덮쳤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혹은, 더 거대한 거짓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제5장: 신은 죽었다
서버실의 공기는 멸균실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습도는 제로에 가까웠고, 온도는 소름이 돋을 만큼 낮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수천 개의 LED 램프가 깜박이며 웅장한 기계음을 낼 것이라 상상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곳은 서버실이라기보다 거대한 무덤, 혹은 제단(祭壇)에 가까웠다.
축구장 반만 한 넓은 공간의 가장자리에 구형 서버 랙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에는 유리로 된 돔 형태의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 그 안이 바로 ‘Q’가 존재하는 심장부, <프로비던스>의 성소(聖所)였다.
“저기예요.”
리혜가 내 등 뒤에서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떨림 대신 기묘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유리 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앙에는 최고급 가죽으로 된 육중한 임원용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들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우주선 조종석이나 전쟁 지휘소를 연상케 하는 위압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조용했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쿨러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죽음의 침묵.
나는 천천히 그 ‘지휘소’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위화감은 확신으로 변했고, 확신은 이내 공포로 바뀌었다.
가까이서 본 책상 위에는 뽀얗게 회색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모니터들의 전원 표시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최신식이라 믿었던 장비들은 자세히 보니 5년은 족히 지난 구형 모델들이었다. 키보드 사이사이에는 거미줄 같은 먼지 뭉치가 끼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훑었다. 손가락에 두꺼운 먼지가 묻어 나왔다. 누군가 앉은 흔적조차 없었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였다.
“Q는? 인공지능은 어디 있어?”
나는 급히 메인 콘솔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쿨러가 끼릭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갔다. 한참 뒤, 메인 모니터에 푸르스름한 부팅 화면이 떴다.
[SYSTEM Q - Last Login: 2019. 05. 12.]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마지막 로그인 기록이 2019년이었다. 5년 전.
“시스템이... 멈춰 있어.”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럴 리가 없어. 매일 아침 지시가 내려오잖아. 어제도, 오늘도 Q의 이름으로 데이터 삭제 명령이 떨어졌어. 인사팀 승진 명단도, 구내식당 메뉴도, 심지어 내 감사 일정까지 전부 Q가 결정한다고 했는데!”
나는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려 로그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쏟아진 데이터는 충격적이었다.
5년 전, ‘Q’의 핵심 연산 알고리즘은 치명적인 과부하 오류로 셧다운되었다. 그 밑에는 Q의 개발 당시 정의가 희미하게 출력되어 있었다.
[Project Q: 인지 편향 제거 및 초효율 의사결정 최적화 모델 (Cognitive Bias Elimination & Hyper-Efficient Decision Model)]
감정을 배제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거창한 목표. 하지만 지금 시스템이 생성해 내는 것은 정교한 경영 전략이 아니었다.
[명령 생성: 데이터 삭제 -> (사유: NULL) -> (근거: 랜덤 변수 44a)]
[오늘의 명언 출력: DB index #2031 (Random selection)]
과거 데이터의 파편들. 무작위로 조합된 단어들. 오류로 발생한 노이즈(Noise).
직원들이 신의 계시처럼 떠받들던 그 엄중한 명령들은, 사실 죽어버린 기계가 내뱉는 잠꼬대나 다름없는 ‘노이즈’였다. 김 대리가 그토록 확신에 차서 수행했던 ‘삭제와 복구’ 작업은, 그저 기계의 버그가 만든 무의미한 삽질이었다. 아침마다 벽에 걸리던 ‘오늘의 명언’은 낡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랜덤으로 뽑힌 문장이었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허탈함 뒤에는 뜨거운 분노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인가. 저 꺼진 모니터? 먼지 쌓인 빈 의자?
<프로비던스>의 수천 명 직원은 지난 5년간,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숭배하며 스스로 감옥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의 야근, 그들의 경쟁, 그들의 충성심... 모든 것이 먼지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었다.
“하... 하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다.
“보세요, 과장님.”
그때, 침묵을 지키던 리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는 꺼져 있는 모니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었어요.”
그녀가 툭 던진 말이 폐부를 찔렀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비어 있죠. 껍데기뿐이에요. 그런데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이곳을 향해 경례를 해요. 그들이 두려워한 건 ‘Q’가 아니에요. ‘지시하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거죠.”
나는 고개를 들어 리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알던 신입 사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텅 빈방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순간, 서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기계가 멈춘 지 5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멈춘 기계가 계속 돌아가는 척 관리해 온 사람. 죽은 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를 냈거나, 혹은 침묵으로 이 거대한 사기극을 방조한 사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 대리.”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당신...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제6장: 실험용 쥐
리혜는 대답 대신 메인 콘솔의 키보드 위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능숙하게 관리자 코드를 입력했다.
[Administrator Access Granted : JU RI-HYE (Chief Architect)]
화면에 뜬 붉은 글씨.
Chief Architect. 수석 설계자.
“빙고.”
그녀가 엔터키를 눌렀다.
순간, 48층 서버실 전체의 조명이 환하게 켜지며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위잉-
“환영해요, 노민호 과장님. 제 실패한 실험실에 오신 걸.”
나는 뒷걸음질 쳤다. 배신감과 공포가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신... 인사팀 신입이 아니었군.”
“신입은 맞아요. 이 직함으로 ‘다시’ 입사한 게 세 달 전일뿐.”
리혜는 메인 콘솔 데스크에 엉덩이를 걸치고 비스듬히 앉았다. 그녀의 뒤로 ‘SYSTEM ERROR’라는 붉은 문구가 점멸하는 모니터들이 마치 후광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마치 이 폐허의 여왕처럼 보였다.
“5년 전, 진짜 Q 시스템을 설계한 건 저와 제 팀이었어요. 우리는 감정을 배제한 완벽한 이성적 경영을 꿈꿨죠. 하지만 변수는 인간이었어요. 인간의 피로도, 감정 기복, 비논리적인 욕망... 이걸 계산에 넣자 시스템은 과부하로 자멸해 버렸어요. 그게 저 빈 의자의 진실이에요.”
그녀는 턱끝으로 먼지 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때 보고했어야 했어! 시스템이 죽었다고! 그랬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5년 동안 우리가 바보처럼 살진 않았을 거 아냐!”
내 고함에 리혜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보고? 누구한테요? 이사? 사장? 아니면 당신 같은 직원들에게?”
그녀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미 Q가 내려주는 결정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 Q가 하라면 하고, 망하면 Q 탓을 하면 됐죠. 그런데 갑자기 신이 죽었다고 알린다면? 이 회사는 그날로 공중분해 됐을 거예요. 아무도, 단 한 명도 스스로 결정 내리는 법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혐오와 기묘한 연민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죽은 신의 행세를 한 건가?”
“아니요. 저는 그저 스피커를 켜두었을 뿐이에요. 죽은 시스템이 내뱉는 의미 없는 노이즈를 ‘경영 지침’이라고 포장해서 송출했죠.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그녀가 내 가슴팍을 검지로 쿡 찔렀다.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더군요. 데이터 삭제? 말도 안 되는 인사 이동? 그들은 맹목적으로 따랐어요. 오히려 더 열광했죠.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일수록 ‘우리가 모르는 심오한 뜻이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 합리화하더군요. 심지어 Q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것에 자부심까지 느끼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김 대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스템 최적화’라며 밥알을 튀기던 그 확신에 찬 얼굴.
“권력은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과장님. 그들의 불안과 나태가 저 빈 의자를 권력으로 완성시킨 거죠.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가장 안전한 목줄을 원해요.”
“개소리하지 마.”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건 평화가 아니야. 사육이지. 당신은 사람들을 가축으로 만든 거야.”
“가축이면 어때요? 행복하다는데.”
리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나를 끌어들인 거야? 이 역겨운 연극을 관객석에서 비웃으려고?”
“아니요. 나도 지겨웠거든요.”
리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깊은 권태와, 위험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100% 예측 가능한 이 쥐새끼들이 지겨웠어요. 복종만 하는 가축들을 보는 게 역겨웠다고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변수를 이 수조에 던져본 거예요. 당신이 이 가짜 유리성을 깨트릴 수 있을지, 아니면 당신조차 저들과 똑같이 익사할지...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론대로 인간은 결국 복종을 선택하는지. 나를 제물 삼아 그녀는 자신의 철학을 검증하려 했다.
“나는 실험용 쥐가 아니야.”
“그걸 증명할 시간이에요, 과장님.”
그녀는 갑자기 데스크의 버튼을 눌러 벽면의 대형 스크린 화면을 전환했다. 서버실 내부가 아닌, 건물 로비와 47층 복도의 CCTV 화면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워크숍 날 밤이었다. 하지만 화면 속에는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경보음은 꺼졌지만, ‘침입자 발생’이라는 알람이 그들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경찰이나 보안 요원이 아니었다.
양복을 입은 대리, 과장, 부장들. 낮에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 방망이나 소화기, 혹은 사무용품들이 무기처럼 들려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게 보이나요?”
리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지금 ‘침입자’인 과장님을 잡으러 오는 게 아니에요. 자신들의 ‘평온한 복종’을 깨뜨리려는 불순물을 제거하러 오는 거죠. 그들은 Q가 가짜라는 진실보다, 내일 출근해서 따라야 할 지침이 사라지는 걸 더 두려워해요.”
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48층으로 통하는 철문을 두드리고 부수기 시작했다. 입모양으로 욕설을 내뱉는 김 대리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시스템을 지켜라. 우리들의 신을 보호하라. 우리들의 안온한 감옥을 부수지 마라.
“이게 당신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이에요. 노민호 씨.”
리혜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권력 자체와 싸우는 건 쉬워요. 그냥 저 빈 의자를 걷어차면 되니까. 하지만 권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저 수천 명의 신도들과 싸우는 것... 그게 진짜 지옥이죠.”
쾅! 쾅! 쾅!
서버실의 육중한 철문이 울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 짐승의 포효에 가까웠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구하려고 했던 동료들이, 나를 찢어발기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촘스키의 문장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권력자는 없다. 오직 복종하는 자들이 권력을 잉태할 뿐이다.
“자, 파수꾼 님.”
리혜가 비상 탈출구를 가리켰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도망칠까요, 아니면 저들에게 먹힐까요?”
제7장: 폭도의 탄생
쾅! 쾅! 쾅!
육중한 강철 문이 비명을 질렀다. 문 너머의 소음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집단적인 굉음이었다.
“들려요?”
주리혜가 비상 탈출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눈빛은 나를 시험하듯 번뜩였다.
“저 문이 뚫리는 데 3분도 안 걸릴 거예요. 지금 나가면 살 수 있어요. 미친 놈 취급은 받겠지만, 적어도 내일 아침 해는 볼 수 있겠죠.”
나는 스크린 속의 사람들을 보았다. 김 대리, 기획팀 박 부장, 인사팀의 최 과장... 낮에는 내게 웃으며 결재 서류를 내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지금, 자신들의 신전(神殿)을 침범당한 광신도의 그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진실을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진실을 덮으러 온 것이다.
도망친다?
그것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 발은 바닥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5년 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무너진 자재 더미 아래 삐져나와 있던 수진의 하얀 운동화. 그때도 나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도망쳤다. 침묵했다. 그 대가로 나는 살아남았지만, 내 영혼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숨을 쉰 적이 없었다.
만약 지금 저 비상구로 나간다면, 나는 영원히 이 유리 감옥의 유령이 될 것이다.
“아니.”
나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목을 조르던 올가미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
나는 대답 대신 메인 콘솔로 달려들었다. 먼지 쌓인 키보드 위로 내 손이 올라갔다.
“전 사원에게 메일을 보낼 거야. 이 텅 빈 의자의 사진, 2019년에 멈춘 로그인 기록, 그리고 Q가 뱉어낸 랜덤 노이즈 로그 파일까지 전부!”
“미쳤군요. 그들이 그걸 믿을 것 같아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적어도 눈앞에 들이밀어 줄 수는 있겠지. 당신들이 섬기던 신이 사실은 먼지 덩어리였다는 걸, 밥 숟가락 뜨다가도 생각나게 만들어 주겠어.”
나는 ‘전사 공지 발송’ 시스템을 해킹 툴로 강제 개방했다. 손가락 끝이 미친 듯이 떨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율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의지로 시스템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전율.
[수신: <프로비던스> 임직원 전체]
[제목: Q는 없습니다. 우리는 속았습니다.]
[첨부: System_Error_Log.jpg, Empty_Chair.jpg]
콰아앙!
문의 경첩 하나가 뜯겨 나갔다. 틈새로 쇠파이프 하나가 쑥 들어왔다.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서버실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저기 있다! 배신자!”
“시스템을 망가뜨린 놈이야! 잡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첨부 파일을 업로드했다. 로딩 바가 느리게 차올랐다. 80%... 90%...
리혜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이 기묘한 사투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것조차 데이터였으리라. ‘진실을 쥔 개인’이 ‘거짓을 믿는 다수’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
99%...
쾅!
마지막 경첩이 부서지며 강철 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먼지 구름과 함께 수십 명의 직원들이 서버실로 난입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성이 없었다. 오직 불안을 제거하겠다는 살의(殺意)만이 가득했다.
나는 엔터키를 내리쳤다.
딸깍.
[전송 완료]
그 순간, 나는 뒤를 돌아 그들을 마주 보았다.
제8장: 유리 감옥의 투쟁
“멈추십시오!”
나의 외침이 서버실의 소음을 일순간 갈랐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메인 콘솔 앞을 막아 섰다. 48층의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인간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 냄새로 뒤덮였다.
“보십시오! 제발 눈을 뜨고 보십시오!”
나는 손가락으로 등 뒤의 대형 모니터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리혜가 띄워놓은 붉은 경고 문구가 선명했다.
[SYSTEM ERROR - SYSTEM DOWN (Since 2019)]
“저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Q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고장 난 기계가 내뱉는 오류 덩어리를 따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정적.
아주 짧은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선두에 섰던 기획팀 박 부장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빈 의자와 꺼진 서버 랙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뒤에 서 있던 김 대리도, 최 과장도 멍하니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진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먼지 쌓인 책상, 낡은 기계들. 그들이 상상했던 최첨단 AI의 성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기대했다. 그들이 주저앉기를. 허탈해하며 자신들의 맹목을 후회하기를.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박 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이 공포에서 분노로, 그리고 다시 부정(Denial)으로 빠르게 일그러졌다.
“네놈이 해킹했지?”
“...뭐라고요?”
“멀쩡하던 시스템을 네가 해킹해서 다운시킨 거잖아! 화면도 조작하고! 우리를 속이려고!”
그의 고함은 신호탄이 되었다.
“맞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Q는 완벽했어!”
“감사팀 과장이 내부 데이터를 조작해서 회사를 망가뜨리려 한다!”
“시스템을 복구해! 당장 저놈을 끌어내!”
그들은 진실(빈 의자)을 보는 대신, 믿고 싶은 거짓(민호가 범인이다)을 선택했다. 그들에게 Q가 가짜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끔찍한 재앙이었다. 만약 Q가 없다면, 지난 5년간 그들이 바친 충성, 야근, 경쟁, 그리고 동료를 밟고 올라선 그 모든 행위가 ‘쓰레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차라리 나를 악마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자아(Ego)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기제.
“죽여버려!”
군중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정신 차려! 저건 깡통이라고!”
누군가의 주먹이 내 턱을 강타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핑 돌았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김 대리의 멱살을 잡았다.
“김 대리! 넌 알잖아! 삭제하고 복구하는 그 미친 짓거리, 그게 정상이냐고!”
김 대리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내 가슴을 밀쳤다.
“닥쳐! 닥쳐! 넌 바이러스야! 의심은 바이러스라고 했어!”
그는 Q가 내려준 ‘오늘의 명언’을 주문처럼 외우며 나를 발로 찼다.
나는 바닥에 처박혔다. 수십 개의 구두발이 내 몸을 덮쳤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찢어지는 피부.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내가 구하려 했던 동료들이 나를 짓밟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닥을 기며 고개를 들었다. 피 섞인 침이 흘러내렸다.
아수라장 너머, 주리혜가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메인 콘솔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직원들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투명 인간처럼, 혹은 이 난장판을 주관하는 신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무언가 말했다.
‘증명해 봐요. 당신이 옳다는 걸.’
나는 짓밟히는 손을 뻗어 그녀를 향해, 아니 저 빈 의자를 향해 뻗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 스마트폰 화면에 뜬 알림이었다.
[메일 전송 완료: 3,428명 수신]
적어도... 씨앗은 뿌렸다.

에필로그: 지하의 기록자
3개월 후.
<프로비던스> 지하 2층, 문서 보관실.
습기를 머금은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이곳은 회사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다. 창문 하나 없는 3평 남짓한 공간. 이곳이 나의 새로운 사무실이었다.
나는 해고당하지 않았다.
회사는 나를 ‘업무 과중으로 인한 일시적 심신 미약자’로 포장했다. 그날 밤의 소동은 ‘외부 세력의 해킹 시도를 막아낸 직원들의 영웅적인 방어’로 둔갑해 사내 뉴스레터에 실렸다. 나는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이곳 지하에 유배되었다.
사실은 안다. 나를 자르지 않은 진짜 이유를. 내가 해고되어 밖에서 떠드는 것보다, 회사 안에 가둬두고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회사의 ‘살아있는 경고판’이 되었다.
윙-
스캐너가 푸른 빛을 내뿜으며 10년 전 회계 문서를 읽어 들였다. 나는 묵묵히 종이를 넘겼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주리혜였다.
그녀는 승진한 듯, 예전보다 훨씬 세련된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여긴 여전히 공기가 탁하네요.”
그녀는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눈가에는 아직 멍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승진 축하해, 주 팀장.”
“고마워요. 다 과장님 덕분이죠.”
그녀는 내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날 밤 이후, Q 시스템을 대폭 업그레이드했어요. 이젠 랜덤 노이즈가 아니에요. 직원들의 사내 메신저, 검색 기록, 표정 변화까지 빅데이터로 분석해서,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지시로 내려요.”
“듣고 싶어 하는 말?”
“네. 더 강력한 통제, 더 확실한 보상, 그리고 내부의 적에 대한 응징. 직원들은 이제 Q를 숭배하는 수준을 넘어섰어요. 과장님이 보낸 그 메일? 사람들은 그걸 ‘해커가 만든 조작된 이미지’라고 믿어요. 진실을 보여줘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 그게 인간이에요.”
리혜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실험은 성공했다. 나의 저항은 오히려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백신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후회하세요? 괜한 짓을 해서 이 지하 감옥에 갇힌 거.”
나는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5년 전, 수진이 죽었을 때 나는 침묵했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말했고, 갇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 안 해.”
나는 셔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그날 밤, 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누군가 혼란을 틈타 내 손에 쥐여주고 간 쪽지였다.
[메일 봤습니다. 저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리혜의 시선이 쪽지에 머물렀다. 그녀의 여유만만하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단 한 명.”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 한 명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당신의 그 완벽한 유리성에는 이미 금이 간 거야. 당신은 3,427명을 속였을지 몰라도, 이 한 명은 속이지 못했어.”
리혜는 말없이 쪽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완벽한 통제 변수에서 벗어난 오차값.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금은 자라난다. 그리고 언젠가 유리를 깨트린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고 보죠. 금이 먼저 커질지, 아니면 보수 공사가 더 빠를지.”
“그래. 지켜볼게. 난 어디 안 가니까.”
리혜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나갔다. 철문이 닫히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썼다. 하지만 그 쓴맛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나는 다시 스캐너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스캔하려던 문서의 여백 구석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이것은 기록이다. 언젠가 이 지하에 내려올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혹은 먼 훗날의 나를 위한.
“의심하라. 살아있다면.”
스캐너의 푸른 불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지하 2층의 고립된 방.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깨어 있었다. 위층의 수천 명이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눈을 뜨고 이 유리의 성을 감시할 것이다.
나는 눈먼 파수꾼이 아닌, 눈을 뜬 죄수니까.
<끝>
뮤직노벨라(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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