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소리 없이 스며드는 사랑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치러지는 희생이 있다. 이 이야기는 세상이 외면했던 한 여인의 긴 침묵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다.
1. 운명의 시작과 비극
1960년대 후반, 눈만 뜨면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 두 자매가 태어났다.
한 배에서 난 자매였지만 가난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언니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어 했다. 일찍 짝을 만나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니는 스무 살에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남자와 결혼했고, 1년 뒤 뒤도 안 돌아보고 한국을 떴다. 그렇게 두 자매는 이별했다. 하지만 동생 순이는 언니처럼 떠날 수가 없었다. 병든 부모님 곁엔 누군가 남아야 했으니까.
열일곱 순이는 공장 여공이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비극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어느 겨울 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순이는 세상이 준 가장 끔찍한 시련과 마주했다. 낯선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열여덟 소녀는 그날 밤,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끔찍한 건 그다음이었다. 얼마 후, 덜컥 아이가 들어선 걸 알게 된 것이다. 원치 않는 아이. 폭력이 남긴 아이.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부모님께 말할 수 있었을까? 70년대 한국에서 미혼모란 단순한 낙인이 아니었다. 집안을 망치는 저주였고, 늙은 부모님이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드는 수치였기 때문이다.
2. 생존을 위한 결심
고민 끝에 그녀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딱 하나만 결심한 채로.
'이 아이를 낳자. 그리고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자.'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다시 공장에 들어갔다. 불러오는 배를 복대로 칭칭 감아가며 일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 편이 아니었다. 만삭이 되자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3. 짧았던 행복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한 남자였다. 고아로 자라 가족이 뭔지 몰랐던 그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밀어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따뜻함은 진짜였다. 그는 그녀를 보살피며 말했다.
"내가 이 아이 아버지가 되겠소."
그렇게 아들이 태어났다. 핏덩이 아들을 품에 안은 순간, 잿빛 같던 그녀의 삶에도 빛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세 식구, 작은 가족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너무 짧았다. 고작 3년. 그게 전부였다.
아들이 세 살 되던 해 겨울, 남편은 공장 기계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이번엔 진짜 혼자였다. 세 살배기 아들을 안고, 설상가상으로 고향 부모님마저 화재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 천지에 기댈 곳이라곤 지구 반대편 캐나다에 있는 언니뿐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그녀는 서울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식당, 공장, 가게... 하지만 갓난애 딸린 여자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애는 누가 봐요?"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4. 아들의 부끄러움과 희생
벼랑 끝에서 구원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한 다방의 마담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담은 그녀 눈빛만 보고도 사정을 알아챘다. 마담은 일자리와 함께 다방 뒤뜰의 작은 쪽방을 내어주었다.
그 좁고 캄캄한 쪽방에서 아이는 자랐다. 엄마가 차를 나르고 웃음을 파는 모습을 보면서. 다방 이모들은 아이를 예뻐했지만, 아이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집은 남들과 다르구나, 하고.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학교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가져왔다.
아들은 거짓말을 채워 넣었다. 엄마 직업은 식당 주인, 아버지는 회사원, 집은 양옥집. 학교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그는 그 거짓말 속에 숨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왜 우리 엄마는 다방에서 일할까? 왜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하지 않을까? 애들이 알면 난 외톨이가 될 거야.'
그 순간, 어머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가난보다, 고된 노동보다 더 아픈 건, 내 새끼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내 존재 자체가 아들에겐 수치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날 밤, 어머니는 결심했다.
'다시는 아들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겠다.'
모아둔 돈 전부, 거기다 마담 언니한테 빚까지 내서 캐나다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우리 아들 좀 맡아줘. 여기서는... 여기서는 내가 아들 앞길을 막아."
언니는 동생의 울음 섞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도 가난이 싫어 도망쳤던 사람이었으니까.
5. 아들의 성공과 어머니의 고독
아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 때,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엄마와 헤어진다는 슬픔보다, 이 구질구질한 쪽방을 탈출한다는 기쁨이 더 컸던 것이다.
아들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우리 가족 다 캐나다로 이민 간다!"
마지막 거짓말이었다. 엄마만 남는다는 사실을, 죽기보다 말하기 싫었으니까.
공항에서의 마지막 포옹.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가서 공부 열심히 해. 엄마도 돈 많이 벌어서 금방 갈게."
물론 거짓말이었다. 비자도, 돈도, 갈 방법도 없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아들은 새 삶을 시작했다. 이모를 엄마라 부르며, 사촌들과 어울리며 그곳 아이가 되어갔다. 한국의 진짜 엄마는 가끔 전화기 너머로만 존재하는, '먼 친척'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서울에 남은 어머니는 기계처럼 일만 했다. 다방을 나와 식당 주방에 들어갔다. 하루 열네 시간 일해 번 돈을 몽땅 캐나다로 보냈다. 학비, 생활비, 옷값, 책값... 전부 다.
아들이 명문 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식당 뒷골목에서 혼자 춤을 췄다. 내 아들이 해냈구나, 내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날은 설거지를 하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10년, 20년이 흘렀다. 어머니 몸은 골병이 들어 더는 남의 밑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목표가 있었으니까.
'아들이 돌아왔을 때, 떳떳한 엄마가 되어 있어야 한다.'
빚을 내어 작은 설렁탕 가게를 열었다. 다방이 아니라, 번듯한 식당 사장님이 되려고. 매일 새벽 뼈가 으스러지도록 사골 국물을 고아내며 상상했다. 의사가 된 아들이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날을.
6. 재회와 잔인한 거짓말
25년. 정말 긴 세월이다. 열세 살에 떠났던 꼬마는 어느덧 서른여덟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아들이 돌아왔다. 저명한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어 금의환향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식은 언니를 통해 들어야 했다.
"순이야, 네 아들이 한국 들어갔어. 그리고... 결혼도 한대."
며칠 후, 아들이 가게를 찾아왔다. 25년 만의 재회. 번쩍이는 양복을 입은 아들과, 낡은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
"엄마..."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두 사람은 가게 구석에 마주 앉았다.
아들은 캐나다에서의 성공, 치열했던 레지던트 생활, 그리고 결혼할 여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컸구나.
그런데, 아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엄마, 저... 여자 친구 집안 어른들께 거짓말을 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자 친구 아버님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 그분이 물으셨어요. 자네 어머님은 뭐 하시는 분인가? 순간... 너무 무서웠어요. 미혼모의 아들이라고 하면, 다방에서 컸다고 하면, 이 혼인이 깨질까 봐..."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어요. 캐나다 어머니가 제 친엄마라고요. 낳아주신 어머니는 저 낳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말해버렸어요."
7. 살아있는 엄마를 지우다
순간, 어머니는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단순히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엄마를,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아들이 살기 위해, 엄마를 죽인 것이다.
"엄마, 용서해줘요. 지금 바로잡기에는... 제가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떨리는 손을 봤다. 그 손은 의사의 손이었지만, 어머니 눈엔 여전히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손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내 아들 살길 찾았으면 된 거야. 죽은 사람 되는 거? 그거 하나도 어렵지 않다. 걱정 마라."
그날 밤, 어머니는 캐나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이번 한 번만, 진짜 우리 아들 엄마가 되어줘. 결혼식 혼주석에 언니가 앉아야 해."
수화기 너머로 언니의 한숨이 들려왔다.
"순이야.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아니야, 언니. 우리 아들 잘못 없어. 내가... 내가 부끄러운 엄마였던 게 죄지. 제발, 아들 앞길 좀 열어줘."
8. 어머니의 침묵과 병의 그림자
결혼식 당일. 호텔 연회장은 내로라하는 하객들로 꽉 찼다. 아들은 멋진 턱시도를 입고 서 있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랑 어머니께서 화촉을 밝혀주시겠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모가 걸어 나갔다. 하객들은 박수를 쳤다. "신랑 어머니가 참 곱다", "캐나다에서 사업을 크게 하신다며?"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진실은 없었다.
이모는 떨리는 손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25년을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온 내 동생 순이가 여기 서야 하는데.'
같은 시각, 서울 변두리의 작은 설렁탕 가게. 어머니는 홀로 주방에 서 있었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고요한 가게에서, 어머니는 뽀얀 사골 국물을 젓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솥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이 어머니의 얼굴을 가렸다. 그게 김인지, 눈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들은 승승장구했다. 병원 일에, 처가 행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머니를 만나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 됐다. 아들은 늘 불안해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엄마, 나 빨리 가봐야 해." 늘 쫓기듯 떠났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전화를 해도, 아들은 아주 사무적인 목소리로 받곤 했다.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그 '나중에'는 오지 않았다. 아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초라한 현실이, 자신의 빛나는 성공에 흠집을 낼까 봐.
그렇게 아들이 떠난 지 수십 년. 어머니 몸이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체한 줄만 알았다. 배가 콕콕 쑤셔와도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이 들면 다 여기저기 고장 나는 거라면서.
하지만 통증은 집요했다. 동네 내과를 찾아 내시경을 받았지만, 의사의 말은 야속하게도 평범했다.
"특별한 이상은 안 보입니다. 신경성인 것 같으니 소화제 드시고 지켜보시죠."
어머니는 그 말에 안도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밤마다 등까지 뚫고 들어오는 고통에 잠을 설쳤다. 밥맛은 뚝 떨어지고, 앞치마 끈이 헐렁해질 만큼 살이 빠졌다.
그래도 어머니는 큰 병원에 가기를 주저했다. 무서웠으니까. 정말 큰 병이면 어떡하나. 행여 아들에게 짐이 되면 어떡하나. 죽는 것보다, 아들 앞길 막는 게 더 두려웠던 것이다.
9. 죽음의 선고와 마지막 부탁
그러던 어느 겨울 밤이었다.
가게 마감을 하던 어머니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무너졌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마침 가게 앞을 지나던 단골손님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머니는 그 차가운 바닥에서 식어갔을지도 모른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 응급실의 분주한 움직임. 혈액 검사, CT, 초음파... 의료진들이 어머니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몇 시간 후,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환자분, 보호자 안 계십니까?"
보호자. 어머니에겐 세상에서 가장 부르기 힘든 단어였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낡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설렁탕 가게 전단지 뒤에 아들 번호를 펜으로 꾹꾹 눌러 적어둔 종이였다.
"이게... 우리 아들 번호인데요. 급한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를 들려 하자, 어머니가 다급하게 의사의 가운 자락을 잡았다.
"선생님, 근데 지금은 안 돼요. 당장은 하지 마세요. 나중에... 제가 좀 괜찮아지면, 아니면 제가 다 정리되면... 그때 해주세요."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잔인한 진실을 전했다.
"췌장암입니다. 이미 말기예요. 간이랑 림프절까지... 너무 늦었습니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얼마나 남았나요?" 묻지도 않았다. 의사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남은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을.
죽음의 선고 앞에서 어머니 머릿속을 스친 건 자신의 인생이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아들이었다. 열여덟 공장 여공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에 존재했던 아들뿐이었다.
10. 호스피스 친구의 위로
며칠 뒤, 병원 사회복지사가 찾아왔다. 앞으로 계획을 묻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치료는 안 받겠습니다. 그냥 덜 아프게만 해주세요. 대신... 마지막 준비를 좀 도와주세요."
어머니는 꼬깃꼬깃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보험 증서, 장례식장 전단지,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메모지들.
"수혜자는 아들로 해놨어요. 장례는 제일 싼 걸로,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주세요. 남은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우리 아들한테 가야 해요."
"어머님, 그래도 가족분들께는 알려야죠. 아드님께 연락드릴까요?"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발... 알리지 마세요. 아들은 지금 제일 바쁠 때예요. 제 죽음이 짐이 되면 안 돼요. 나중에... 제가 다 정리되면 그때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힘없이 부서지는 곳.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그 조용한 곳에서, 어머니는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옆 침대를 쓰는, 비슷한 처지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밤, 통증에 잠 못 이루던 어머니가 울먹였다.
"내가 죄인이야. 자식한테 짐만 되고..."
그러자 친구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순이 언니, 그런 말 마. 나도 딸한테 내 병 숨겼어. 그게 죄가 아니야. 엄마라서 그런 거야. 사랑이라서 그런 거라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춥고 긴 밤을 견뎌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가게 문은 닫혔고, 마담 언니와 캐나다 언니의 걱정 어린 전화도 어머니에겐 닿지 못했다.
아들 역시 몰랐다. 병원에서 회의를 하다가, 처가 식구들과 웃으며 밥을 먹다가도 문득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별일 없겠지', '나중에 가보면 되지'. 그 오만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반년이 지나 봄기운이 돌 무렵, 어머니 손은 펜을 쥘 힘조차 없었다. 미리 준비해둔 세 개의 편지 봉투. 하지만 그 안의 편지지는 미완성이었다.
그때, 곁을 지키던 친구가 말했다.
"내가 써줄게. 언니 마음 토씨 하나 안 빠트리고 다 적어줄게. 걱정 마."
어머니는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뒤, 벚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던 어느 봄날.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우리 아들... 밥은 먹었을까... 우리 아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 친구의 흐느낌만이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11. 편지 도착과 아들의 오열
병원은 어머니 유언대로 움직였다. 조용한 화장, 그리고 바다. 아들에게는 어떤 연락도 가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후, 친구는 약속을 지켰다. 어머니가 남긴 세 통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마담 언니, 캐나다 언니, 그리고 아들에게.
편지를 받은 마담 언니는 한걸음에 가게로 달려갔다.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마담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불쌍한 내 새끼,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보냈어야 했는데..."
며칠 후, 아들의 병원 연구실. 수북이 쌓인 서류 틈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 이름이 없는 낯선 편지.
아들은 무심코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첫 줄을 읽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혀 모르는 낯선 필체였기 때문이다.
아드님께 올립니다.
저는 어머님과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어머님께서 펜을 쥘 기력조차 남지 않으셔서, 제가 대신 어머님 말씀을 받아 적습니다. 부디, 어머니의 마지막 마음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아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타인의 글씨로 적힌 문장들. 하지만 그 말투는, 그 온도는 누가 봐도 어머니였다.
사랑하는 내 아들...
엄마가 미안해. 말도 없이 가서. 하지만 엄마는 알았어. 나의 죽음조차 너에게는 짐이 될 거라는 걸. 그래서 조용히 떠나기로 했어. 네가 나를 죽었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슬프지 않았어. 오히려 안도했어. 이제 우리 아들은 안전하구나. 내 초라한 인생이 네 발목을 잡지 않겠구나.결혼식 날, 가게에서 혼자 사골 국물을 끓이며 기도했어. 우리 아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달라고. 엄마는 그거면 됐어.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엄마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네가 내 아들이라서, 엄마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어. 넌 나의 희망이었고, 나의 전부였어.
아들아, 부디 죄책감 갖지 마. 너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엄마도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우리는 서로를 지킨 거야. 다음 세상에서는 엄마가 정말 멋진 부자 엄마가 돼서 너를 찾아갈게. 그때는 우리 아들이 엄마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 줄게.
사랑한다. 내 아들. 엄마 아들로 와줘서 고마웠어.
엄마가,
아들은 편지를 움켜쥐고 무너졌다. 연구실 바닥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엄마! 엄마!"
하지만 대답 없는 허공만이 그의 울음을 삼켰다.
그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어머니의 가게로, 옛집으로, 호스피스 병원으로 달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다에 뿌려진 뒤였다.
12. 아들의 변화와 아내의 위로
그날 이후 일 년 동안, 아들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매주 주말, 그는 혼자 바다를 찾았다. 아내는 처음엔 이유를 물었지만, 말없는 그의 슬픔을 보며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이 캐나다 이모를 친엄마라 속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아들은 잠든 아내 곁에서 조용히 말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떨렸다.
"당신... 사실... 우리 엄마는..."
아내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당신도... 당신 엄마도... 다 최선을 다한 거잖아요."
그 말 한마디로, 아들은 비로소 죄책감으로부터 숨을 쉴 수 있었다.
13. 딸의 출생과 이름의 귀환
그다음 해, 아들에게 딸이 태어났다. 출산실에서 아내가 물었다. 남편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름... 뭐라고 지을까?"
아들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작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닌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이. 우리 엄마 이름이야."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그래요. 그 이름... 참 예쁘다."
14. 에필로그 : 순이가 바다에게
세월이 흘러, 순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유치원에서 가족 소개 시간이 열렸다.
"저는 김순이예요! 아빠가 제 이름을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분 이름으로 지어주셨대요!"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실 뒤편에서 그 모습을 보던 아들은 딸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엔 뜨거운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아들은 딸을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그래, 순이야. 할머니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
어느 맑은 주말, 아들은 딸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바다를 찾았다. 딸이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할머니! 순이 왔어요!"
파도가 밀려와 두 사람의 발목을 적셨다. 마치 어머니가 '오냐, 내 새끼들 왔구나' 하며 쓰다듬는 것처럼.
그 순간, 아들은 깨달았다. '엄마는... 죽은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났구나.' 이제 더 이상 '순이'는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 사랑의 증거였다.
맺음말
사랑은 그렇게 이어진다. 후회와 아픔을 넘어, 기억을 통해, 이름을 통해.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계속 말해주는 한, 그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지금 당신의 휴대폰을 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어쩌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이 세 마디를 전하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다.
뮤직노벨라 : <닿을 수 없는 꽃> AI 가수 조우 (테스트 중)
https://youtu.be/1-HW6yp4y7w?si=VTBqGfsyv4GzT1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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