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신뢰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공민희 옮김 / 스스로를 돕는다!
자기신뢰의 화두는 언제나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갈림길에 다다른다. 혹자는 이 둘의 관계를 적대적이지 않은 공생의 관계로 보고 있으나 내 생각은 ‘신이 만든 인간’과 ‘인간이 만든 신’ 중 무엇을 믿느냐, 혹은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서로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적대적 관계라 본다.
물론 무엇을 선택하던 그것은 본인의 자유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각인된 환경에서 새로움을 들춰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신본주의자 입장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자유의지로 인간을 탐구하고 사물의 정의할 수 있지만 결국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대명제하에서의 자유일 뿐, 인간의 본질적 근원을 인간 스스로에 두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인본주의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머슨의 글 속에 이런 갈등을 찾을 순 없었다. 그가 주장하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다분히 인본주의에 그 기초를 두는 것 같다. 하지만 글 곳곳에 언급된 신의 모습을 보건데, 에머슨의 사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큰 오류를 될 수 있음을 짐작하고 나만의 고민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의 글 중 오랜 시간 마음에 머문 구절이 있다.
“신과 인간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사람은 스스로 돕는 사람이다.” (책 56쪽)
에머슨은 강한 어조로 정체성 확립을 강조한다. 경우에 따라선 고립되는 외로운 처지에 처하더라도 내면의 기준을 통해 강건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어디에도 책잡힐 일을 피하고 주변의 시선을 감당하면서도 자신을 꾸밈없고, 선입견 없고, 뇌물이 통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순수함으로 자신을 살피는 사람’이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 던지는 말은 의견 이상의 강력한 호소력이 얻는다고 주장한다.
‘스스로를 돕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에머슨의 글을 읽고 짐작하자면 이는 단순한 노력이나 실천이 아닌 ‘본성에 의지한’ 노력을 말한다. 즉 신념에 의지하란 의미이다. 자기신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대중적 기준에 신념을 양보한다. 남들과 비슷한 생각과 빛깔로 자신의 기준을 삼는다. 당장은 이것이 편하고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신념의 일관성 때문에 빚어질 모순에 대해 유연성을 논한다.
대중의 틀에 편승하는 것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하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신념의 일관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에머슨은 이렇게 얘기한다.
“자기 신뢰에서 멀어지도록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또 다른 공포는 일관성이다. 과거의 행동이나 말을 숭배하는 건 다른 사람의 시각 궤도에 우리의 과거 행동 말고 입력할 다른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키길 극도로 꺼리고 있다. (중략) 어리석은 일관성은 일부 정치인과 철학자, 성직자가 추종하는 편협한 마음속 도깨비와 같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벽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자신을 걱정할 것이다. 지금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한 걸 다시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물론 오늘 한 모든 말에 모순이 될지라도.” (책 27~28쪽)
결국 스스로 돕는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다듬어 온 본인의 신념에 의지하여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틀릴 수 있다는 유연성을 전제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신이 보시기에도, 인간이 보기에도 옳다는 것이다.
통찰은 대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통해 다가온다. 가끔은 예측치 못한 경험을 통해서도 느껴지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짧고 조리 있게 정리하기란 통찰만큼이나 어렵다.
아무튼 에머슨의 자기신뢰를 읽는 동안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검열하는 자기객관화보다 그 너머 어딘가에 밝게 빛나고 있을 자신만의 신념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그것이 당장은 모순이더라도 자기를 돕는 큰 걸음이 분명하니 말이다.